한줄 詩

홀씨의 나날 - 윤성택

마루안 2017. 5. 1. 20:15



홀씨의 나날 - 윤성택



새벽부터 골목 구석구석
햇살이 날렸다
허리띠를 맨 끝까지 채웠던
사내는,
뿌리처럼 툭 불거져나온
속옷을 쑤셔넣었다
틈만 나면 살고 싶었다
공사장 보도블록 사이
가는 목 하느작거리는
홀씨 하나
어쩌자고 이곳까지 온 것인지
바람이 지나칠 때마다
현기증이 일었다
백지장 같은 날들,
사내는 후들거리며
벽돌을 지고
일어서고 있었다



*시집, 리트머스, 문학동네








산동네의 밤 - 윤성택



춥다, 웅크린 채 서로를 맞대고 있는
집들이 작은 창으로 불씨를 품고 있었다
가로등은 언덕배기부터 뚜벅뚜벅 걸어와
골목의 담장을 세워주고 지나갔다
가까이 실뿌리처럼 금이 간
담벼락 위엔 아직 걷지 않은 빨래가
바람을 차고 오르내렸다
나는 미로같이 얽혀 있는 골목을 나와
이정표로 서 있는 구멍가게에서 소주를 샀다
어둠에 익숙한 이 동네에서는
몇 촉의 전구로 스스로의 몸에
불을 매달 수 있는 것일까
점점이 피어난 저 창의 작은 불빛들
불러모아 허물없이 잔을 돌리고 싶었다
어두운 방안에서 더듬더듬 스위치를 찾을 때
나도 누군가에게 건너가는 먼 불빛이었구나
따스하게 안겨오는 환한 불빛 아래
나는 수수꽃처럼 서서 웃었다
창밖을 보면 보일러의 연기 따라 별들이
늙은 은행나무 가지 사이마다 내려와
불씨 하나씩 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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