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옛날 사람 - 곽효환

마루안 2017. 4. 8. 05:26



옛날 사람 - 곽효환



때론 사랑이 시들해질 때가 있지
달력 그림 같은 창밖 풍경들도 이내 무료해지듯
경춘선 기차 객실에 나란히 앉아 재잘거리다
넓은 어깨에 고개를 묻고 잠이 든 그 설렘도
덕수궁 돌담길 따라 걷던 끝날 것 같지 않은 그 떨림도
북촌마을 막다른 골목 가슴 터질듯 두근거리던 입맞춤도
그냥 지겨워질 때가 있지
그래서 보낸 사람이 있지


세월이 흘러 홀로 지나온 길을 남몰래 돌아보지
날은 어둡고 텅 빈 하늘 아래 드문드문 가로등불
오래돤 성당 앞 가로수 길에 찬바람 불고
낙엽과 함께 뒹구는 당신 이름, 당신과의 날들
빛바랜 누런 털, 눈물 그렁그렁한 선한 눈망울
영화 속 늙은 소 같은 옛날 사람
시들하고 지겨웠던, 휴식이고 위로였던 그 이름
늘 내 안에 있는 당신


이제 눈물을 훔치며 무릎을 내미네
두근거림은 없어도 이런 것도 사랑이라고



*시집, 지도에 없는 집, 문학과지성








지도에 없는 집 - 곽효환



지도에 없는 길 하나를 만났다
엉엉 울며 혹은 치미는 눈물을 삼키고 도시로 떠난
지나간 사람들의 그림자 가득해
이제는 하루 종일 오는 이도 가는 이도 드문
한때는 차부였을지도 모를 빈 버스 정류소


그곳에서 멀지 않은 비포장길
지금 어디에 있다고 너 어디로 가야 한다고
단호하게 지시하던 내비게이션 소리도 멈춘 지 오래
텅 빈 인적 없는 한적함이 두려움으로 찾아드는
길섶에 두려운 마음을 접고 차를 세웠다


오래전 서낭신이 살았을 법한 늙은 나무를 지나
교목들이 이룬 숲에 노루 울음 가득한 여름 산길
하늘엔 잿빛 날개를 편 수리 한 쌍 낮게 날고
투명하고 차가운 개울 몇을 건너
굽이굽이 난 길이 더는 없을 법한
모퉁이를 돌아서도 한참을 더 걸은 뒤
고즈넉한 밭고랑
황토 짓이겨 벽 붙이고 슬레이트 지붕을 얹은 곡식 창고
함석지붕을 머리에 인 처마가 깊은 집이 있다
산나물이 들풀처럼 자라는
담도 길도 경계도 인적도 없는 이곳은
세상에 대한 기억마저도 비워낸 것 같다 그래서


지도에 없는 길이 끝나는 그곳에
누구도 허물 수 없는 집 한 채 온전히 짓고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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