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다시 목련을 꿈꾸며 - 심재휘

마루안 2017. 4. 4. 01:00



다시 목련을 꿈꾸며 - 심재휘



꽃씨를 받지 못한지 오래되었다고
고향에서 편지가 왔다
그 밤의 흙비에 목련의 꽃이 지고 오늘은
종일 흐릴 뿐이었다 대낮에도 불 밝힌
가로등은 불길하게 깜박거렸다
세상이 방전되고 있었다


우리가 목련의 만개(滿開)까지 걸어왔던 시간보다
꽃잎들이 가야 할 마지막 길은 멀어 보였다
목련이 지고 있다는 답장을 썼지만
보내지는 못했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새들은 죽은 나뭇가지로
더는 집을 짓지 못하고 떠나는 봄을
배웅하였다 기약이 없어서 처연하였다



*시집, 적당히 쓸쓸하게 바람 부는, 문학세계사








바람의 경치 - 심재휘



고속도로를 지나 국도와 또 어느 봄날
느티나무 저 높은 가지 끝에도 물이 오를까
싶은 지방도로 끝난 곳에서 우리는 무슨 잎을
피우나 이제 그대에게 어떤 편지를 쓰나
그리운 당신 더 쓸 말은 없구려 이만
생각하면 언제나 누군가 옆에 있었건만
바다로 이어진 제방에 나는 늘
혼자 앉아 있었던 거였다
산기슭에서 연을 날리던 아이들은 바람 부는
들판을 쏘다니다가 어느 뻘밭에서 늙어갔는지
포구의 폐선들 잔물결에도 일렁거린다 때때로
바람은 숲에 몸을 숨기고 우리를 노려보다가도
낄낄대며 나와 새들을 높이 날리곤 하였는데
새들이 바람을 몸에 품으며 바람의 영토에서
훨훨 벗어나는 걸 바람은 몰랐던 거다
몰랐으므로 또한
새가 되지 못하는
나는


당도하지 않은 그대의 소식처럼 떠돈다
그러나 떠도는 것은 그대와 나의 운명
여관에서 밤새 썼던 나의 편지들이
우체국 어두운 사서함 속에서 낡아가듯
그대 역시 마을의 거리에서 혼자 늙어갈 테지
온몸에 바람의 문신을 새기며 쓸쓸할 테지
하지만 그대여 나는 내 얼굴을 스쳐 천천히
지나가는 이 잔혹한 기운 속에다 이렇게 쓰려 한다
그대와 함께 했던 날들은 감히 아름다웠다고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복사꽃 그녀 - 손진은  (0) 2017.04.10
옛날 사람 - 곽효환  (0) 2017.04.08
겁 없는 골목 - 정병근  (0) 2017.04.04
안타까운 꽃 - 원무현  (0) 2017.04.03
가려운 봄 - 이성목  (0) 2017.04.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