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처마가 길바닥에 닿는 - 최서림

마루안 2017. 3. 28. 17:43


 

처마가 길바닥에 닿는 - 최서림



사람은 보이는 것만 본다
흙탕물이 휩쓸고 지나간 집 같은 내면은
자세히 들여다볼 때만 겨우 보인다
지리한 인생의 장마 끝에나
슬쩍 보이는 법이다
몸안에 농짝이 뒤집어지고
방이고 마루고 부엌이고
뻘밭이 되어
허옇게 눈알이 뒤집혀본 사람만
작파한 인생의 속을 헤아려본다


나면서부터
작파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동네
햄스터처럼
나면서부터
눈치만 키워온 사람들


등짝에 뿌리가 나도록 놀아본 사람만이
출근하는 척 살금살금
처마가 길에 닿는 집을
몰래 빠져나가는 딸년을 알아채는 법이다
알고도 속아주는 늙은 혜량(惠諒)이
장맛비에도 떠내려가지 않고
거무죽죽한 살집 속에
뼈같이 박혀 있다
길바닥보다 낮은 동네에는



*시집, 버들치, 문학동네








입구도 모르는 - 최서림



커피전문점보다 여전히
다방이 더 익숙해서 들어가기 편한 동네
쭈글쭈글한 인생들이 대낮부터
지하 88다방에 죽치고 앉아
금붕어처럼 뻐끔뻐끔거리고 있다
쉽게 열었다 금세 망하는 미장원들만 있고
기껏해야 하루방 똥돼지, 삼겹살집만 있다
새로 들어온 대형 할인마트가 문어처럼
이 누추한 동네 구석구석에다
빨판을 들이대고 돈을 흡착한다
어디서 냄샐 맡고 왔는지
뉴타운 재개발 부동산업자들이
피라냐처럼 우글거린다
이 동네에도 영수학원 버스가 들락거리고
폐지 팔아 만든 돈 뜯어가는 아들이 있고
간통이 있고 집 나간 여편네가 있다
천막지붕의 구멍가게에서는 여느 동네와 마찬가지로
먹고 싸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생필품들을 팔고 있다
건달들이 많아 당구장이 잘되고
삼천 원짜리 손칼국수가 잘 팔리는 동네
내가 결코 들어갈 수 없는
입구도 모르는 이 동네가 뜯기면
끽 소리도 못하고 짓뭉개져서
어디로 흘러가 사라지나, 사라지나





# 최서림 시인은 1956년 경북 청도 출생으로 서울대 국문과 및 동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졸업했다. 1993년 <현대시>를 통해 문단에 나왔다. 시집으로 <이서국으로 들어가다>, <유토피아 없이 사는 법>, <세상의 가시를 더듬다>, <구멍>, <물금>, <버들치>가 있다.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만경강 트로소 - 서규정  (0) 2017.03.30
시간의 손 안에서 - 전대호  (0) 2017.03.30
삼월의 눈보라 - 박승민  (0) 2017.03.24
앉아서 말하다 - 이영광  (0) 2017.03.24
타르코프스키 감독의 고향 - 황지우  (0) 2017.03.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