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거울을 들여다 볼 적 - 조항록

마루안 2017. 3. 31. 00:19



거울을 들여다 볼 적 - 조항록



면도칼에 살을 베이고
너의 악담을 실현하고 있는 나를 살핀다
그래, 상처는 나의 숙명
이 길은 계속 험난할 것이다
아이들은 점점 나와 생각이 다를 것이며
아내는 오늘보다 조금 더 뻔뻔해질 것이다
어딘가에서 독재자는 끊임없이 태어나고
기상청의 일기예보는 자주 어긋날 게 틀림없다
잘 먹고 잘 살라는 너의 작별 인사가 악담인 줄
나는 진작 불길한 예감처럼 울컥했으니
정말로 잘 먹고 잘 살려고 아등거리다
그 사실을 번쩍 벼락처럼 되새길 따름이다
아침 일찍 샘솟는 한 줄기 피를 보고 나서야
새삼, 낯선 얼굴인 듯 꼼꼼히 들여다보면
나는 더 이상 순정을 이야기할 자신이 없다
나의 체온은 몰라보게 식어버렸으니
오로지 잘 먹고 잘 살라고 고함치는
내 안에 숨어 있는 나여, 너는
왜 보이지 않는데 어디에나 있는지
내 목소리는 왜 항상 귓가에서 웅성거리는지
어째서 그것이 내가 작별하지 못하는 다른 나인지
길고양이처럼 숨어 있던 스물네 살의 청춘이
순간, 짧은 통증에 비명을 내지른다
거울 속에는 항상 내가 존재한다



*시집, 거룩한 그물, 푸른사상








아, 노인 - 조항록



계단은 불편하다


수십 번 꺾이고 꺾어
굴종과 자만을 반복하며
그 어딘가에 이르렀을 당신의 물기 없는 무릎


허공을 걸어
만날 허공을 끌어올렸을 뿐이다
그래서 지금 헛되게 숨이 차고 뼈가 저릴 것이다


아직 뜨거운 심장을 가졌으나
남은 계단은 가파르고


당신이 아득하게 바라보는
청춘의 검은 뒤통수들
계단의 유혹에 성큼성큼 걸음을 내딛는
아, 옛날





# 들켰다. 이 시에서 현재의 나와 과거의 나와 미래의 나를 동시에 읽는다. 몇칠 전에 샤워를 마치고 거울 속에서 나를 봤다. 거울만 안 보면 아직도 청년인데 중년의 얼굴이 낯설다. 그래도 이런 시를 읽고 나면 잠시 위안이 되기도 하거늘,, 나는 아직 청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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