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삼월의 눈보라 - 박승민

마루안 2017. 3. 24. 06:01

 

 

삼월의 눈보라 - 박승민


저 때 아닌 것들
영원하지도 않은 것들
온 산을 뿌옇게 추상화로 춤추네
허공에서 봉두난발로 내려와
지상의 외로운 발바닥들
온몸으로 덮네

나는 말짱한데
너는 왜 아프냐고
말도 못하는 저것
듣지도 못하는 저 허망이
자꾸 말을 거네

목숨은 허공중에 살다
순식간에 가는 거라고
천지간
분별을 지우고
풍경을 지우고
생과 사를 비웃으며
마음대로 흔들리다 가네
몸이 곧 유언장이었네

가고 싶네
처자식 버리고
막춤 추는 저 눈보라 속으로


*시집, 지붕의 등뼈, 푸른사상사

 

 

 

 

 


하류(下流)의 시 - 박승민


다가오는 것은 하류의 물결에 지나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나를 견뎌준 건
먼 과거의 어느 시간쯤에서 만난
한 순간

순간의 화인(火印)

이후는 물에 갇힌 수몰주민의 생이었고
때로는 이미 지나가 버렸을지도 모를 어떤 다복(多福)을
나는 무성의하게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비루가 습속이 된 이 가죽옷에도
나비의 날개가 헌 눈처럼 부서지고

시계를 보지 않아도 다가올 시간을 예감하는 나이
첫 소절만 들어도 노래의 끝을 개괄할 수 있는 나이
임종이 최후의 목적지가 아니어도
알고 보면 모두 그쪽으로 가고 있었다

아름다운 것은 모두 지나가는 하류의 물결에 지나지 않았다

흘러가지 않는 바람이 없었고
머물 수 있는 바람도 없었고

 

 

 

 

# 박승민 시인은 1964년 경북 영주 출생으로 숭실대 불문과를 졸업했다. 2007년 <내일을 여는 작가>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지붕의 등뼈>, <슬픔을 말리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