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앉아서 말하다 - 이영광

마루안 2017. 3. 24. 05:53



앉아서 말하다 - 이영광



먼 곳의 조사(弔事)에 다녀왔다
서울은 날이 풀려 역력히 스산하고
집 뒤 논밭들이 접히거나 펴지는 듯 희미하니
눈이 녹는가보다 삼동에도 세상은 젖는가
보다 젖은 옷을 털고 늦은 점심을 지어 먹고
술을 한잔, 딱 한잔만 따라 놓는다
(차였으면 좋았을 걸) 독에 길들여진
몸이 다시 독을 찾는데, 손이 떨린다
남의 죽음 곁에서 나를 설명하느라 헤맸다
오랜만에 사람 만나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폭설 속에서 차는 밀가루 반죽처럼 꾸물거렸다
멀고 오랜 곳에서 돌아온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가구들, 장식이
없는 벽들, 잊혀진다는 것은 나의 공포였으나
아무도 없는 곳이 이렇게 아늑할 줄이야
결국 혼자가 되기 위해 여기까지 온 것인가
이곳이 대체 어딘가 또 문을 열어놓았던가
나는 다정하지 못했다 메마른 세월을
밟고 다녔을 뿐 정강이도 눈빛도 각이
부풀었다, 날로 생각나는 건
이 세상에 내 것이란 애당초 없었다는 것
그렇지, 동의하듯 다시 날리는 눈발
잔을 들고, 제 위의 발길들 지워주면서
마을 잃은 길들이 끝내 자기를 지우는 걸 본다
산기슭의 희미했던 경계가 사춘기처럼 컴컴해지고
긴 잠을 준비하는 새들이 남천(南天)에서 온다
깜박, 불이 꺼지듯 나는 깨달았다
나는 다만 오래 나를 떠돌았을 뿐
세상의 둥근 의자에 앉아 있으면 자객처럼
어디엔가 완전히 묻혀버리고 싶은 생각이 들고
나의 생애 발 씻고 간 자들이 눈앞을 지나간다
바깥의 어둠, 천천히 걸어 안으로 들어온다



*시집, 직선 위에서 떨다, 창작과비평








헌책들 - 이영광



원수의 멸망을 보려거든 그가 늙을 때까지 기다려라
늙으면 필연코 추해진다


화장으로 가릴 수 없는 시든 주름들과
힘 빠져 늘어진 뱃가죽,
저 웅크린 매음녀의 짧은 한평생을
보라, 침처럼 흘러내리는 중얼거림이
그 옛날의 흔해빠진 사랑의 고백이거나
노골적인 호객의 대사임을 듣고
그대는 놀라리라, 스스로를 팔기 위해
악착같이 이 거리에 매달린 생이
늦은 11월, 떨어져 비 젖은 나뭇잎과
쓰레기를 닮아간다는 사실,
문득 술 취한 어느 손길이 그녀의
팔을 잡았다가 깜짝 놀라 물러설 때도
희미하게 그 어둔 눈빛 반짝인다는 사실,
이 거리의 어느 누구도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팔리기를 포기하는 법은 없다, 그러나
그녀의 늙음은 너무 빨리 찾아왔다
그녀의 늙음은 너무 쉽게 노출된다
상처를 이루지 못한 비싼 사랑의 흔적들이
정액처럼 표지 위에 얼룩져 있다


신간 코너에서 베스트셀러 코너로,
재고 도서로 쌓였다가 다시 무수한 손을 거쳐
지루한 세일 기간 동안 싸구려로
드디어 제값으로 팔리기 위해 나와 않은 헌책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