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농담 - 이문재

마루안 2017. 2. 2. 23:33

 

 

농담 - 이문재

 

문득 아름다운 것과 마주쳤을 때
지금 곁에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면 그대는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그윽한 풍경이나
제대로 맛을 낸 음식 앞에서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 사람
그 사람은 정말 강하거나
아니면 진짜 외로운 사람이다


종소리를 더 멀리 내보내기 위하여
종은 더 아파야 한다

 


*이문재 시집, 제국호텔, 문학동네

 

 

 

 

 


기찻길은 기차보다 길어야 한다 - 이문재

 

 

라일락꽃 피고, 아, 하복 윗주머니 파란 잉크 자국 생각
오래된 여자상고가 있던 곳, 담장을 끼고 봄의 왼쪽으로 돌아나오는데
물끄러미, 내가 앞서가는 내 잔등을 바라보고 있다
그래, 생각은 生覺일 때가 있어서 생의 걸음을 멈추게 한다
그리하여, 나를 따라오지 않고 서 있는 나를 부르는 것인데
저기, 열일곱 라일락 하얀 꽃그늘 아래 꼼짝 않고 서 있는 내가
지금 여기, 건널목에서 돌아선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다
먼 곳에서 달려와, 또 먼 곳으로 달려가는 기차가 지나간다
이렇게, 생각은 여러 곳에 흩어져 있는 시간을 소집해
기어이, 건널목에 봄날을 세워놓고 대면시킨다
그래, 미안하다, 지금 여기 있는 내가 잘못한 것이다
라일락꽃 피고, 바다에서 온 기차가 다시 바다로 돌아간다
그래, 기찻길은 언제나 기차보다 길어야 한다
열일곱 살아, 이리 오너라, 다 내 잘못이었다
너와 나, 아니 나의 모든 나들은 이제 함께 가야 한다
그렇지 않느냐, 우리보다 우리 삶이 커야 하는 것이다

 

 

 


# 이문재 시인은 1959년 경기 김포 출생으로 경희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1982년 <시운동> 4집에 시를 발표하며 등단했다. 시집으로 <제국호텔>, <마음의 오지>, <산책시편>, <내 젖은 구두 벗어 해에게 보여줄 때>, <지금 여기가 맨 앞>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