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손바닥 속의 항해 - 김성규

마루안 2017. 1. 24. 02:13



손바닥 속의 항해 - 김성규



어떻게든 이 병실을 빠져나가야 한다 밤마다

베개를 찢어 바람에 날린다

벚나무 사이로 떠내려가는 헝겊 쪼가리


쉬지 않고 잎사귀를 먹어치우듯

온몸에 병균이 퍼져가고 있다

나뭇가지를 옮겨다니며 꿈틀거리는 벌레들,

의사는 내게 주사를 놓고 벚꽃 날리는

창밖 풍경을 감상해보라고 권한다


벌레들이 달라붙은 유리창을 보며 병실 벽을 두드린다

진흙처럼 뭉개진 손바닥,

저것들이 나를 찾아 기어올 것이다

나를 갉아먹으며

살아 꿈틀거리게 만드는 그 무엇


가운을 입고 일어서는 나를 보며

놀란 새들이 꽃을 물고 날아간다

창문으로 새어들어오는 달빛에 손바닥을 적신다

손금을 따라 고이는 노란 약물,

아직도 내가 살아 있구나

헝겊처럼 얇은 달이 지문에 부딪혀 가라앉는다



*시집, 너는 잘못 날아왔다, 창비








거식자(拒食者) - 김성규



끌려다니며 죽을 수도 있었으리

더디게 찾아왔지만,

기억은 길거리로 달려가 소리지르고

골목에서 어슬렁거리는 개들

자기 그림자를 보고 멈칫거린다

곡식을 쓸어올리던 바람이 하늘로 빠져나가고

오랫동안 방문을 걸어잠근 사람들

창문을 더욱 꼭 닫아둔다

성장은 쓸모없는 향수와도 같아

살가죽을 뚫고 나오려는 실핏줄이

사내의 몸을 휘감고 조용히 몸부림치는 오후

며칠째 눌러붙은 밥덩어리와

반찬찌꺼기를 냉장고에서 꺼내 먹으며

살 수도 있었으리 온몸 신열을 앓으며,

주택가 골목 아이들은 뛰어나와

다시 자기 집으로 돌아가고

하루하루 자신의 영혼을 파먹으며

잠 속에서 그는 더욱 살이 오른다

태어나 세상에 남길 것은

몸뚱이뿐이라는 듯 아무리 날아도

벗어날 수 없는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날갯짓하는 새들

굶주린 사내의 귓바퀴를 발톱으로 움켜쥐고

달팽이관에 상처 없는 알을 낳는다






# 김성규 시인은 1977년 충북 옥천 출생으로 명지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고 동대학원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200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너는 잘못 날아왔다>, <천국은 언제쯤 망가진 자들을 수거해가나>가 있다. 시힘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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