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이런 게 필요한 아침 - 임곤택

마루안 2017. 1. 30. 07:17

 

 

이런 게 필요한 아침 - 임곤택

 

 

잡지의 표지를 손톱으로

벅벅 긁어 드러난 그런 배경이 좋겠다

 

창에 은박지를 붙여놓았다

새들어온 빛이 환등기같이 담배연기를 비춘다

좀 눌은 벽지 위가 좋겠다

한 아저씨가 다가와 바지를 쓱 내리는

변두리 극장쯤이 좋겠다

 

게슴츠레한 노래가 좋겠다

책보다는 거울이, 일자로 다듬은 콧수염이 좋겠다

담배를 또 문다

새벽까지 아이들에게 글 잘 쓰는 비급을 전수하고

소주 딱 한 병 마시고 온 아침

 

신문은 오지 않는 게 좋겠다

빨간 코의 유쾌한 광대가 문 두드리면 좋겠다

 

당신의 나라가 흑백으로 치직거리고

여자는 남자의 어깨를 두들기며 웃고

 

 

*시집, 지상의 하루, 문예중앙

 

 

 

 

 

 

이런 안부를 묻다 - 임곤택

 

 

머리가 맑다 작은 소리가 잘 들린다

그렇게 슬프고

그렇게 우스웠는데

매년 봄 가야 하는 병원도 걸렀는데

피 검사와 소변 검사를 하고 흉부 엑스레이를 찍어야 했는데

글이 잘 써지고

정신이 너무 맑아서

기관지의 칼칼한 기미 다 삼켜진 줄 알았는데

일어설 때마다 눈앞에 날리던 꽃씨들

다 잦아든 것 같았는데

정오의 태양은 갈피를 잡을 수 없는데

두어 권 책을 선 채로 읽고

구호를 외치는 노병들의 일사분란함을

곁눈질로 보고

비가 내릴 거라는 뉴스를 떠올렸는데

귀가 더 필요한데

여벌의 눈과 더 많은 손끝이 필요한데

왜 이렇게 머리가 맑은지

구역질이 나도록 머리가 맑은지

 

 

 

 

 

*시인의 말

 

여기는

처마 밑이거나 객석일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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