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암벽에 서다 - 정해종

마루안 2017. 1. 16. 21:26



암벽에 서다 - 정해종

 

숲이 밀리고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수십 길 콘크리트 벼랑이 생겼다
내가 사는 105동과 벼랑 사이,
한 사람의 희망의 면적만큼
어설프게 볕이 지나가고 나면
온종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이따금 고양이 울음 같은 바람소리 들려올 뿐,
면벽의 시간 속으로 고요의 시멘트 한 겹을
더 두르고 그늘이 짙어간다


누구 하나 마음 두지 않는
그곳 어디에 뿌릴 두고 있는지
콘크리트 암벽을 뚫고 나오는 풀들이 있고,
식물도감에서는 본 적이 없는
구리 동전 같은 꽃들이 피었다 지기도 한다
時도 空도 다 굳어버린, 화석이 된
숲의 추억뿐인 막막한 세상에
저 혼자 살아있다고
바람 불지 않아도 악쓰듯 몸 흔드는,


하루에도 몇 번씩 마음이 벼랑으로 몰린다
수직에 가까운 저 세상의 기울기를
바라만 봐도 아찔한데 단 한 번의 실족을
허락하지 않는 콘크리트 바닥처럼
삶은 누구에게나 완고한 법이라며,
너도 이제 삼십이니
나가서 뿌리내려야 하지 않겠냐고
누군가 자꾸 등을 떠민다


떠밀려 나온 세상의,
곡예처럼 아슬아슬한 나의 일상에 대하여
실낱같은 뿌리로 암벽을 꽉 붙들고 버티는
꽃들의 짧은 일생은 무어라 말하는 걸까
기적처럼 나비 한 마리 암벽을 거슬러
그 꽃으로 날아들기도 한다
사는 게 다 기적이다



*시집, 우울증의 애인을 위하여, 고려원

 


 





연애편지를 쓰는 밤 - 정해종

 

 
당신이 마련하신
기쁨과 고통의 행사에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미 몇 명이 다녀가셨다지요
꽃을 준비하지 못한 건
시들지 않는 기쁨을
선사하고 싶어서였습니다
그러나 시들지 않는 꽃이란 게
끝내 사그라지지 않는 사랑이란 게
있기나 하던가요
살아 있음을 인생이라 하고
피어 있을 때만이 꽃이라 하고
고통을 기쁨으로 받아들일 때만이
사랑이라 하지 않던가요
믿을 수 없는 것들이지요
그대의 문을 두드리지 못한 건
이 믿을 수 없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어서였습니다
용서하십시오





# 내가 이 세상에 나온 것은 우연이었을 것이다. 정해진 운명대로 흘러가는 건지는 몰라도 얼마나 고마운 삶인가. 비록 고장난 인생일지라도 살아있을 때 기쁨도 느끼는 것을,,,, 나 또한 사는 게 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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