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한 마리 낙타가 되어 - 박철

마루안 2017. 1. 16. 07:07



한 마리 낙타가 되어 - 박철



나도 누군가의 꿈에 한번쯤은 나타났겠다
전혀 예기치 않게 한 마리 낙타가 되어
무심히 사막을 건너고 있었겠다
그도 나처럼 일어나 여명에 기대어
이유 없이 먼 사막에 골몰했겠다
만남이란 사람이 하는 일이 아닌 것
그저 사람 사이에 흐르는 향기와 같다
먼 이역을 떠돌 사람과 꿈속에서 옛이야기를 하다가
울컥하여 잠에서 달려나오니
눈물도 사람의 것이 아닌 듯 숨죽이며 흐르고
결국 세상을 이토록 아름답게 채우는 것은
사람과 사람의 눅진 냄새이려니
너와 나 그런 향기를 지닌 채
멀리 한평생 살다 가기도 했겠다



*시집, 불을 지펴야겠다, 문학동네








행주강 - 박철



내 눈이 점점 커지는 것은 외로움 탓이다
시가 길어지는 일처럼 요즘 그리움이란 지금은 부재하는 저 하늘의
별들과 같다 누군가 나의 별빛을 본다면 희망에 대해 노래해다오
꿈의 불빛을 따라 김포에서 일산으로 이사와 나는 자주 강으로 나간다
안개 짙은 야적, 강의 하류에선 그들 나름대로 시대를 앓고
둑으로 쌓아올리는 바람이 외면을 받으며 갈대 곁에 섰다
언덕을 돌아 결국 다시 만나련만
강폭이 점점 커지는 것은 할 말이 많아서일 거다
사랑이든 역사든 배고픔을 달래는 무엇이든 말로써 될일이 아니건만
물살이 거듭 손마디를 꺾으며 행주강이 흐른다
사백 년 전 임진란의 함성이 되살아나 내 가슴에 화살을 쏘아대는 강
치마폭에 돌덩이를 주워담던 아낙도 가끔은 허리를 펴 강 건너 친정아비의
안부가 그립기도 했을 저녁 바람처럼 날이 진다


오늘은 먼 사랑
내 인생은 겨우 강 하나 건너온 것이다
그것도 개구리헤엄조차 잊고 육중한 시멘트 다리를 빠르게 건너왔다
사람들은 오 분이면 건너는 강을 때론 오십 년이 걸려서 지나온다
꿈의 불빛을 따라 김포에서 일산으로 이사와 나는 자주 강으로 나간다
물수제비를 뜨며 천둥오리 날고
나의 파랑(波浪)을 아는 안개가 더 큰 한숨을 쉬노니
안개의 흐린 눈빛은 다만 난세 탓이고
내가 점점 외로워지는 것은 그래도 생의 아름다움 때문이다
그렇게 믿고, 그렇게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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