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감염된 나라에서 - 서윤후

마루안 2017. 1. 9. 21:27



감염된 나라에서 - 서윤후



재난 영화가 끝났다
간판 없는 극장을 빠져나왔다 나는 미래의 간병인을 만나고 오는 길이었다
사례금이 모자라 다시 살아서 극장 밖을 걸어 나왔다 영화 속엔 내가 아는 사람들이 죽어 가고 있었다


암전된 방구석보다 더 어두운 사람들의 불행을 보며 나를 위로한다 재난 영화가 자꾸 흥행에 실패하는 나라에서
내가 아는 모든 사람들은 거의 죽어 있다


살기 위해선 하나가 다른 하나를 껴안으며
고작 하나가 되는 일을 해야 했다
그것이 고작 우리의 모든 면역력이어서
쉽게 병이 들고 쉽게 영화를 보며 울었다


변이된 세포들이 서로를 벗기고 닮아 가며 하나의 심장을 향해 싸우는 복도에서 우리는 사랑에 감염되고 쉼 없이 식어가는 덧셈을 풀었다 그 사이사이엔 이미 사라진 인류가 있었지만
심장과 무관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위해 쓴다


병에 자연스럽게 감염된 사람들이
다시 둘로 나뉘는 방식으로 폐허를 지켰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장면을 보려고 극장에 간다
전망하기 좋은 절망을 위해 매표소엔 끝이 없는 줄들이 늘어서 있고
조조할인은 끝났다



*시집, 어느 누구의 모든 동생, 민음사








아프레게르 푸줏간 - 서윤후



고기반찬을 보면
심장 밖을 뛰쳐나간 사람들이 생각나


버려진 아이들아, 꿈으로 팽창한 실핏줄을 터뜨리며 울어라, 말했지만
거긴 붉은 고기가 맛있어 보이는 푸줏간이었구나


그만 이곳에서 떠나가거라, 들렸지만
노인들은 갈 곳이 없었다 아직 주인의 이름을 이마에 새기지 않은 아이들이
저렇게 늙기 싫어 저렇게 늙기 싫어
희한한 귀신 놀이를 하고 있다


폐허에 붉은 벽돌을 다시 쌓아올릴 사람, 늙은 노인들을 모시고 다른 나라로 갈사람, 폐허가 될 때까지 다시 싸울 사람, 잠만 자고 꿈을 축낼 사람
불발된 총알처럼 한 시간 뒤엔 문밖을 나선다, 돌아오는 일이 제 심장에 방아쇠를 당기는 일처럼 여겨지면


망설임 속에 피어나는 핏덩이들
말랑말랑한 고기
숨 쉬는 육식
먹고 싶은 것을 예쁘다고 말해주는 거울 앞에서


거대한 것이 무섭다는 것보단 맛있을까 봐
그래서 입맛을 다시게 될까 봐
함부로 꼬리를 자르고
아이들의 숨통부터 알아볼까 봐


과거를 조감하는 푸줏간 근방의 칼질이
칼질 없이 피를 가졌다는 심장으로 태어나고
고기반찬을 먹었다 죄책감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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