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그렇게 나이를 먹는다 - 박남준

마루안 2017. 1. 8. 06:36



그렇게 나이를 먹는다 - 박남준



무를 깎아 먹는다
희디흰 무쪽 한입 베어먹으면
이제 잇몸도 무른 것인가
붉은 피 한 점 선연히도 찍혔다
속이 쓰리는 줄 번연히 알면서도
끝을 보고서야 아랫배를 쓸어내린다
문득 이것들 다 옛날 그 겨울밤
다름 아닌 그대로다
이렇게도 따라가며 닮아가는가
흑백사진처럼 유년을 더듬는 겨울밤
추억은 문풍지처럼 흔들리며 아련하다



*시집, 다만 흘러가는 것들을 듣는다, 문학동네








늙은 무덤 - 박남준



누구의 깊은 잠인가 무덤이 늙었다
서릿발의 늦가을 꼼지락꼼지락
가을꽃들 게워내며 남은 햇볕에 꾸벅이는
무덤이 늙었다 살아서는 자식들에 죽어서는
저 풀꽃들에 자리 다 내어줘도 품안이 모자라다
어디에선가 오래 전 살던 이 먼길 떠나고
홀로 흔들리던 낡은 집 풀썩 무너져가는 소리
잊혀진다는 것은 얼마나 눈물나는 것이냐
전생의 어느 아득한 이름을 부르며 나를 여기 이끌었나
저 늙고 잔등 헐은 무덤에 내 등을 내밀며
한세상 훌쩍 건너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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