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내, 떨어지다 - 류흔
바닥이 그의 얼굴을 문질렀을 때
그는 이미 지상을 떠나고 있었다
납작 엎드린 그의 그림자가 두려움에 떨고 있을 뿐
날개 없는 것들의 최후는 이렇게
얼굴조차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확 쓸면 그만인 바닥에서
닦아내고 지워진다
이제 편한가, 사내여
마음 한 장 얻어갔는가 사내여
남겨논 구두 한 켤레로 맞바꾼 것이
1초, 2초, 또는 3초 동안의 바람과 경관,
혹 느꼈을지 모를 자유였다니!
그것으로 만족하는가
사내여,
여기 엎질러진 이마와 주름과 울음의 얼룩이
한 동이 물로 간단히 씻겨질 때
자네가 공중에 펼친 묘기의 수고로움과
때로, 진지하게 보이는 느닷없는 활강을
날아가지 않는 날개를
사람들은 금새 지워버릴 것이다
*시집, 꽃의 배후, 바보새
없이 산다 - 류흔
없이 산다.
없이 사는데
누가 업신여기는가.
없이 사는 것은 내가 자초한 일.
먼지를 훅 불었는데, 재차 내려앉는 먼지들.
없이 살며 있는 척해봐도 그때뿐
결국 없이 살게 되는 것을.
그래서,
이제는 대놓고 없이 산다.
누가 뭐랄 것인가.
다만, 우리 집 입들에게 미안할 뿐.
그렁그렁한 눈물들에게 죄송할 뿐.
없이 사는 게 무에 대순가.
그게 그리 나쁜 일인가.
내가 죄인인가.
그렇다면 가주랴? 감옥.
그래.
차라리 나 대신 '없이'를 가두라.
'없이'가 외로울 테니 '살자'를 함께 가두자.
2인용 감옥에서 없이와 살자가 알콩달콩
콩밥 나누며 살게 하자.
한 십 년 썩고 나면 둘이 한몸 되어
'없이살자'가 되지 않을까.
그들이 출옥해서
내가 무엇이든 있는 걸 보면 나를 죽이려 들 것이므로
나는
없이 산다.
# 류흔 시인은 1964년 경북 안동 출생으로 2009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지원금을 받아 2011년 시집 <꽃의 배후>를 발간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11년 <시산맥>으로 재등단했다. 시집으로 <꽃의 배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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