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눈발이 날리는 세모에 - 신경림

마루안 2017. 1. 4. 07:27

 

 

눈발이 날리는 세모에 - 신경림

 

 

하나는 십수년 징역을 살고

하나는 그가 세상에 두고 간 아내와 아내와 딸을 거두고 먹이고 가르치고

오랜 세월

 

하나가 창살 안에서 달을 보며 주먹을 쥔 그 숱한 세월

하나는 거리에서 비와 바람에 맞서 땅도 넓히고 집도 올리고

그가 두고 간 아내와 딸과 더불어

 

이제 세상에 나와 하나는

더 좋은 세상을 만들겠다며 목이 쉬어 거리를 누비고

뜻없이 산 세월이 원통해 하나는 한숨으로 세월을 보내다가도

 

눈발이 날리는 세모에 마침내 마주앉아 그들 술잔을 부딪친다

자네 있어 나 든든하다면서

자네 있어 나 자랑스럽다면서

 

이 땅에 그들 친구로 태어나서

바람과 눈비 속에 형제로 태어나서

 

눈발 날리는 세모에

 

 

*시집, 낙타, 창비

 

 

 

 

 

 

어쩌다 꿈에 보는 - 신경림


​복사꽃이 피어 있었을 거야.
장마당 앞으로 길게 강물이 흐르고 강물 위로는 안개가 피어나고.
사람들은 모이고 흩어지면서 웅성웅성 뜻 모를 말들을 주고받고
나는 덜렁덜렁 사람들 사이를 어슬렁거리면서 즐거워도 하고 슬퍼도 했지.
어디선가 물새도 울었어, 아침인데도 닭들이 홰를 치고.
나는 노새였던가, 아니면 나귀였던가.

​어쩌다 꿈에 보는 이것이 내 전생일까!

​나는 나무가 되는 꿈을 꾸는 일도 있다.
낮이고 밤이고 여름이고 겨울이고 바람과 눈비에 시달리면서
안타까이 그 전생의 나만을 추억하고 있는 꿈을.
조금은 거짓되기도 하고 또 조금은 위선에 빠지기도 하면서
그것이 부끄러워 괴로워도 하고 또 자못 안도도 하던 전생의,
그것이 억울하고 한스러워 밤새 잠을 이루지도 못하던
그 전생의 나만을 추억하고 있는 나무가 되는 꿈을. 

​어쩌다 꿈에 되는 이 나무가 내생일까!​


 

 

# 신경림 시인은 1935년 충북 충주 출생으로 동국대를 졸업했다. 1956년 <문학예술>에 <갈대> 등이 추천되어 등단했다. 시집으로 <농무>, <새재>, <달 넘세>, <가난한 사랑 노래>, <길>, <쓰러진 자의 꿈>,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 <뿔> 등이 있다. 만해문학상, 이산문학상, 공초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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