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쑥부쟁이 피다 - 김추인

마루안 2016. 11. 6. 21:55



쑥부쟁이 피다 - 김추인



가을이사 붉든가 말든가
족속들의 꽃 덤불 저만치 두고
혼자 감감 낭떠러지 아래나 짚어보는
꽃아
불쟁이 딸아
벼랑 귀 잡고 서서 저를 보라- 흔들어 쌓는
네 꽃 짓, 눈이 시리다


떼 갈가마귀 구름장을 물고 잣봉을 넘으면
동강이 곧 시끄러워지겠는데


뉘 오신다 전갈 있었더냐


네 젖은 꽃대궁들 일어서면 춤인데
바람이 먼저 읽고 소문내는 들국 향인데
두고 간 이승처럼 돌아와 가을볕에 나앉은
쑥부쟁이 꽃아
네 천년 바래움도 휘어도는 물,
이쯤에서 묻었더냐 저리 비색翡色이다


어라연 저 물의 낯빛 뉘 그리움 아니겠더냐



*김추인 시집, 행성의 아이들, 서정시학








겨울을 조감하다 - 김추인



설렘 대신 침묵을 취합니다
말랑함 대신 딱딱함을
채움 대신 비움을 가을걷이 후의 침울한 잿빛
그 텅 빈 쓸쓸함을 취합니다


마른 입술들이 주절대는 자음들이나
우 우 바람의 모음들이 알아채었을
시간의 고집
그 어김없는 소멸과 생성의 자리바꿈이
장독 얼어터지는 길
그 끝에 있음을 아닌 탓


세상 모든 기다림은
신기루의 기미로 해서 견디어지는 것
긴 착시의 기다림 끝에 닿고서야
발설되는 꽃의 말씀 아는 때문


행보 대신 멈춤을 취합니다
문진 같은 겨울 한 토막으로 저를 꾹 눌어두고
기다리라 주문을 걸어 보는 것은


길 그 끝에 꽃을 진 분 계신 까닭이겠습니다





# 시집 행성의 아이들에 실린 명시다. 김추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이전 문예지에 발표한 시를 제목도 살짝 고치고 몇 군데 손질을 했다. 성형수술을 잘한 시다. 시를 읽다 보면 시인들이 퇴고를 거듭하고 때론 잦은 성형수술로 선풍기 아줌마처럼 너덜너덜해진 시를 발견한다. 가을이사 붉든가 말든가. 이 구절이 미치겠다. 나는 유난히 가을꽃을 좋아한다. 코스모스는 물론이고 그 중 쑥부쟁이와 구절초다. 둘을 잘 구분 못해도 둘 다 좋다.


쑥부쟁이는 들국화 일종으로 '쑥을 캐는 대장장이 딸' '쑥 불쟁이'라 부른 데서 유래한 이름이란다. 산골 가난한 대장장이 딸이 쑥을 캐러 다니다 멧돼지 함정에 빠진 젊은 사냥꾼을 구해 서로 사랑하게 된다. 그러나 "가을에 돌아오마." 떠난 사냥꾼은 오지 않고 쑥 캐며 기다리던 그녀가 발을 헛디뎌 벼랑에 떨어져 죽으니 거기 피어난 여러해살이 꽃이 쑥부쟁이다. 이 전설 또한 미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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