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풍선 - 김사인

마루안 2016. 11. 4. 08:54



풍선 - 김사인



한번은 터지는 것
터져 넝마 조각이 되는 것
우연한 손톱
우연한 처마 끝
우연한 나뭇가지
조금 이르거나 늦을 뿐
모퉁이는 어디에나 있으므로.


많이 불릴수록 몸은 침에 삭지 무거워지지.
조금 질긴 것도 있지만
큰 의미는 없다네.
모퉁이를 피해도 소용없네.
이번엔 조금씩 바람이 새나가지.



어린 풍선들은 모른다
한번 불리기 시작하면 그만둘 수 없다는 걸
뽐내고 싶어지지
더 더 더 더 커지고 싶지.


아차,
한순간 사라지네 허깨비처럼
누더기 살점만 길바닥에 흩어진다네.


어쩔 수 없네 아아,
불리지 않으면 풍선이 아닌 걸.



*시집, 어린 당나귀 곁에서, 창비








화양연화 - 김사인



모든 좋은 날들은 흘러가는 것 잃어버린 주홍 머리핀처럼 물러서는 저녁 바다처럼. 좋은 날들은 손가락 사이로 모래알처럼 새나가지 덧없다는 말처럼 덧없이, 속절없다는 말처럼이나 속절없이. 수염은 희끗해지고 짓궂은 시간은 눈가에 내려앉아 잡아당기지. 어느덧 모든 유리창엔 먼지가 앉지 흐릿해지지. 어디서 끈을 놓친 것일까. 누구도 우리를 맞당겨주지 않지 어느 날부터. 누구도 빛나는 눈으로 바라봐주지 않지.


눈멀고 귀먹은 시간이 곧 오리니 겨울 숲처럼 더는 아무것도 애닯지 않은 시간이 다가오리니


잘 가렴 눈물겨운 날들아.
작은 우산 속 어깨를 겯고 꽃장화 탕탕 물장난 치며
슬픔 없는 나라로 너희는 가서
철모르는 오누인 듯 살아가거라.
아무도 모르게 살아가거라.






# 읽을수록 가슴에 스며드는 절창이다. 오래전에 읽은 시인데 지나쳤던 문장이 이제서야 온전히 내 것으로 박힌다. 몇 구절은 따끔한 가시처럼 또 몇 구절은 아련한 추억처럼,, 시는 그대로인데 읽는 시기에 따라 이렇게 숙성이 되다니 시란 참 묘한 것이다.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무소속 - 이영광  (0) 2016.11.20
쑥부쟁이 피다 - 김추인  (0) 2016.11.06
독한 낙엽 - 강영환  (0) 2016.10.19
흔들리는 가을 - 이수익  (0) 2016.10.17
오늘은 나의 날 - 유계영  (0) 2016.1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