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슬픔의 약력 - 윤의섭

마루안 2016. 10. 6. 23:07



슬픔의 약력 - 윤의섭



어느덧 단풍 들 차례다

서녘에 파리한 얼굴을 반쯤 파묻은 낮달이 떴으나

이변으로 기록되진 않았다

하루마다 노을 지지만 파국의 흔적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은 것처럼

시월의 잉크가 나뭇잎을 물들여 가는 사태는 한 줄 문장으로도 기입되지 못한다

다만 이 모든 풍경을 바라보며 生이 긍휼해질 때가 있는 것이다

가지 잘려 나간 자리에 생긴 옹이를 평생 품고 살아야 할 나무다

흩어지면 다시는 처음으로 복원되지 못하는 구름의 결이다

거진 반세기 전 생년과 아무도 모르는 생몰연도는 빼 버리고라도

아침에 날아든 느닷없는 부고로 생긴 남은 날의 퇴적층만이 아니라

한나절 가짜 굴비 절대 아니라며 떠들어 대는 트럭 확성기에 지친 청력과

짐작했어도 돌이킬 수 없는 건강진단서 결과의 암담함과

오래전 잊은 사람 마음 뒤늦게 전해 들어 쓰리도록 아픈 가슴과

초저녁 서늘한 바람에 이유 없이 복받쳐 오르는 서글픔까지

이토록 간략한 역사가 없다

이제 곧 해거름이고 어둠이 짙어질 것이다

늘 겪는 순서이므로 누구나 다음 차례를 예언할 줄 안다

별이 떠오를 것이며 간혹 꿈을 꾸게 될 것이라고 점칠 줄 안다

그 와중에 희소성 없는 小事는 잊힐 테지만

어느 차례에 다시 등장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오늘 약력이 반세기 전 생년에 이미 쓰였을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



*시집, 묵시록, 민음사








불시착 - 윤의섭



앞집 담장에는 수의를 맞춰 준다는 현수막이 걸렸다

싸늘한 가을바람이 휘감긴다

어젯밤부터 눈치는 채고 있었다

길가의 풀벌레들이 다가서는 기척에 가로등 점멸하듯 울음을 끌 때

좀 전까지 보이던 별이 갑자기 사라졌을 때

그러나 이 과묵한 아침에 어김없이 돌고 있는 미장원 간판과

필사적으로 햇살을 헤집는 플라타너스 잎새는 왜 낯설지 않은가

베란다에서 세상과 연을 다한 장미는 줄기에 매달린 채 풍장을 선택하고

몇 개월째 방치되었던 차는 감쪽같이 사라졌다

한 무리가 모여 앉아 밥을 먹는다

수북한 고봉의 묘혈을 판다

새로 이륙하기 어렵다는 사실은 모두 알고 있다

언제나 마당을 깨끗이 쓸어 싸리비 자국이 선명하다

활주로 표식처럼 돌멩이를 가지런히 고르고 물을 뿌렸다

방바닥의 먼지를 걷어 내고 제식처럼 하루 종일 가구를 문지른다

오늘도 별빛은 내려올 것이다 






*시인의 말


여기 실린 시편들로

'그렇군' 하는 끄덕임을 얻을 수 있다면

어쩌면 수수세기 지난 후에야 생겨날지도 모를

모든 가능한 것의 실재에 대한 예지를

부지불식간에 경험한 것이라고

생각해 보는 어느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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