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산책길 - 김명기

마루안 2016. 9. 25. 21:53



산책길 - 김명기



가을이 되면 한 줄 이력이 되는 기침이
밤새 내 몸을 핥고 간 이른 아침
잠 덜 깬 관절로 야윈 길을 걷는다.
뒤꿈치 바깥쪽으로 잘 닳은 오래된 신발 같은 길
앉은 자리 꽃 피웠던 것들이 사라져
그 길 같은 빈 대궁만 남은 길을
아주 천천히 걷다가
문득, 오래전 이곳이 길이 아니었을 때
나는 무엇이었을까 생각해보니
우주의 자궁에서 와르르 쏟아지길 기다리던
별들 중 하나였을 듯싶다
그처럼 오래 반짝이고 싶었을


간밤 어둠 속에 너무 오래 웅크렸던 탓이리라



*시집, 북평 장날 만난 체 게바라, 문학의전당








곁 - 김명기



어느 새벽 능동적인 그 말, 문득
수동적이라 느껴졌을 때
나는 그것에서 참 멀리도 떨어져 있네
때때로 취기 없는 술자리에서
실없이 쓸쓸하다거나
눈물조차 배지 않는 슬픔을
내 것인양 무미하게 내뱉을 때마다
그것은 내게서 조금씩 멀어졌을 터
준다는 것과 머문다는 것이
얼마나 힘겨운 일인지
있다는 것과 없다는 것의 간극은
또 얼마나 아득한 틈인지
혼자 든 잠에서 깨어
분별없이 아침을 기다리며
더는 잠 오지 않는 어둠 속에서
설움이 비만처럼 부푼 가슴을
쓰다듬는 새벽녘
언제 그것이 한 번이라도 잉여였던 적은 있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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