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가을 부근 - 정일근

마루안 2016. 9. 23. 23:57



가을 부근 - 정일근
-경주 남산



불락(不樂) 무행처(無幸處)의 더운 여름이 찾아왔을 때도
남산은 침묵하며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여름꽃들이 시들며 가을이 온다고
개울물들이 차가워지며 가을이 온다고
계절의 전언을 전해주어도
산은 면벽하고 앉아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다
시중드는 나무들도 푸른 잎이 부끄러운 듯
산정 바람을 불러 투덜거린다
그런 푸른 투덜거림 사이 사이
단풍잎 한 장 몰래 숨어 가을의 이름을 불러
돌부처의 뺨이 붉어지는
은밀한 화엄의 시간 있으니
마을의 비어 있던 아궁이마다 다시 불이 지펴지고
팽팽했던 산의 어깨가 서쪽으로부터 조금씩 무너지며
보라, 가을은 온다.



*시집, 경주 남산, 문학동네








길 - 정일근 
-경주 남산



분명 한 번도 걸어간 적이 없었지만
언젠가 걸어간 적이 있다는 생각이 드는
그런 길이 있듯
경주 남산 길이 그렇다


어머니 금오산과 아버지 고위산 무릎 사이
착한 자식들처럼 다툼 없이 흘러내린 마흔 계곡
어느 길을 걸어가더라도
남산 길은 편안하고 낯이 익다


저기 저기쯤 누군가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
푸른 유월의 산모롱이를 돌아서면
돌부처가 나무 그늘에 앉아 말을 걸고


사유의 맨발이 아파올 때쯤이면
작은 돌탑이, 빈터로 남은 절집의 주춧돌이
쉬어 가라고 불쑥 발을 잡는 산길


나는 천 년 전에도 이 길을 걸어가던
신라의 사람이었으리
마음의 길을 찾아 걸어가던
경주 남산의 운수납자였으리


언제나 마음이 먼저 길을 열고
발길보다 앞장서서 산을 오르는 길을 따라
갈림길 위에서도 한 점 미혹이 없는 산길을 따라
다시 천 년이 흘러간 뒤에도 나는
즐거이 이 길을 걸어가려니


내가 오늘의 나를 까마득히 잊어버릴지라도
길은 나를 반겨 앞장서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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