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거룩한 죄인 - 김장호

마루안 2016. 10. 9. 21:06



거룩한 죄인 - 김장호
-전봇대 26



당신은 몇 번입니까?


눈만 뜨면 순위가 매겨지고
통장잔고 확인하듯
수시로 자신의 위치를 보고해야 한다


당신은 번호공화국의 거룩한 시민
언제 어디서든 번호순
구령소리 울리면
즉시 새로운 번호를 승인받아야 한다


모르면 우왕좌왕
틀리면 속수무책
잊으면 무용지물


언젠가
설움이 복받쳐 이마를 짓찧었던
길가 전봇대도
당신의 위치를 기억하고 있다


먼 훗날 묘원에 묻히면
묘비의 모양과 크기 똑같을지라도
당신의 번호는 집요하게 따라붙는다


당신은 번호공화국의 거룩한 죄인
가슴에 찍힌 수인번호가
당신 얼굴이다



*김장호 시집, 전봇대, 한국문연








어느 전기 수리공의 비망록 - 김장호
-전봇대 33



숱한 몸뚱이가 누웠던 축축한 자리
천장을 보고 똑바로 눕는다


팬티 차림의 암팡진 사내가 천천히 다가온다 발목의 번호표를 벗겨내고 곧장 밀기 시작한다 가슴 때가 벌떡벌떡 일어나고 왼쪽 늑골 밑이 발갛게 아프다 전봇대 오르내리면서 참 가슴 졸인 일도 적지 않았지 사내가 뱃살을 고무지우개처럼 빡빡 밀어간다 뱃심을 부리면 때가 많은 건지 부끄러운 속 때까지 마구 쏟아지네 사타구니에 쪼그린 때도 스멀스멀 기어 나오자 사내가 급히 온수 한 바가지를 껴 얹는다(짝! 짝! 옆으로 눕는다)


오지랖 넓어선지 팔에서도 때가 엄청 나온다 겨드랑이엔 웃음 바이러스가 서식하는 곳, 식구들 웃음 찌꺼기까지 킥킥거리며 떨어진다 한데 첫눈에 감전되었던 옛사랑의 옆구리 땟자국은 밀어도 안 지워지네 다리가 의붓자식보다 낫다는데 사내가 다리를 밀어주니 오금 저렸던 무르팍이 조금씩 펴진다 사람은 팔자가 좋아야 한다지만 질 줄 아는 싸움도 마다 않고 코뿔소처럼 대들기도 했지 그렇지만 게임에 졌다고 투덜대지 않는다(짝! 짝! 돌아눕는다)


집 나서면 따라붙는 죽음의 그림자 인간이 가장 공포감을 느낀다는 십일 미터 높이의 고압선 전봇대 타고 오를 때 맞닥뜨리는 이만이천구백볼트의 운명 자칫 감전되면 육신이 까맣게 타들어가는 숙명이지 팔이 전선에 척 달라붙는 순간, 몸 안으로 불덩이가 들어오는 느낌이네 결국 내 오른쪽 발가락 하나 잘랐지 사내가 목과 어깨의 거무스레한 때를 털어내고 뭉친 근육을 살살 풀어준다 남자는 허리가 생명인데 굴신하던 등허리의 때가 고분고분 내려오고, 숨죽인 아킬레스건의 때도 재빨리 뛰어내린다 영혼의 보릿고개를 넘어온 전사戰士의 때가 개운하게 벗겨진다(짝! 짝! 끝난 모양이다)


몸에 비누칠해주며 사내가 씨익 웃었다
사장님, 때가 참 많으시네





# 연필에 침을 묻혀 또박또박 글씨를 썼듯이 이 시는 굵은 글씨로 새겨진 구절을 눈여겨 봐야 한다. 바닥까지 가라앉아 본 사람은 안다. 이 시가 얼마나 경험에서 우러난 좋은 시인지를,, 좋은 시가 뭐냐 물으면 나는 대답한다. 좋은 시는 자꾸 반복해서 읽고 싶은 시라고,,,, 이해가 안 되어 반복해 읽는 것이 아니라 가슴을 떨리게 해서 다시 읽게 된다. 시인도 많고 시도 넘쳐나는 시대다. 그러나 반복해서 읽고 싶은 시는 많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