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운명의 형식 - 김명인

마루안 2016. 9. 18. 19:32



운명의 형식 - 김명인



물은, 하늘로 간다, 산길을 오를 때
계곡이 되어 흐르는 작은 개울은 발목을 적시지만
미리 마음도 젖었는지, 수풀 사이로
물소리를 피워올리는 여울의 긴 여로
어떤 울림은 물무늬의 파장으로도 허공중을
가득 채워놓기도 하지
안개 잦아들며 골짜기 문득 비 서성거린다
저쪽 능선까지는 시선이 닿지 않는다, 저 계곡
어느 하류에서도 연어들은
한 시절의 방랑을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물 냄새로 끝없는 母川을 이루는
운명의 근원으로 이끌릴 뿐
풍경은 산비탈의 가까운 광경들 굴참나무 숲들이
세월을 견디며 그 자리에 선 것을 보여준다
어떤 필생으로 우리가 저렇게 묶인다 해도
너무 아름다워서 거기서 마쳐도 좋을
無化에의 세부들도 있었을 것이다
때로는 텅 빈 경이로 우리 슬픔을 가두던
마침내 바꿀 수 없었던 형식이 있었듯이
우리는 이제 계곡 저쪽으로는 건너가지 못할 것이다
여기 어디 우리 능선이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비 그치자 산색이 내려놓은 초록 잎사귀마다
이슬 매달려 반짝이다, 사라지는 내용의
또한 투명함이여
저 초록처럼 나 지금 물든 사랑이 있어
내 사랑 슬픔은 완성하지 않는다, 다만
순간순간 그 슬픔으로 낡아가도록 둘 뿐,
어떤 바꿈살이도 배추흰나비가 제 애벌레를
기억하지 않듯
속으로 흘러내리는 마음도 오래 보고 있으면
물소리에 섞여 풍경에서 허공으로
저렇게 한없이 지워져버리는 것을!



*시집, 푸른 강아지와 놀다, 문학과지성








그대의 말뚝 - 김명인



그대가 병을 이기지 못하였다, 병한테 손들어버린
그대를 하직하고 돌아오는 십일월 길은
보도마다 빈손으로 허공을 어루만지며 낙엽이
한꺼번에 져 내렸다
나는, 문상에서 이미 젖어 저 길 어디에
오래도록 축축할 그대의 집을 바라보았다, 거리
모퉁이에는 낙엽을 태우는 청소부들 몇 명
지상의 불씨를 그대가 불어서
결코 다시 키울 수 없는 저 모반의 모닥불 가까이
그대의 경작이 없다, 그러니 경자유전(耕者有田)의 밭들은
이제 밤 되면 하늘 속으로 옮겨지고 잡초처럼
별들 돋아나서 반짝일 것이다
우리가 세상에 말 매어둘 일 많아 그 일 중 하나를
그대와 내가 지킨다고 하였으나
인적 그친 아파트의 공터를 가로지를 때 나는
내 말뚝에도 이미 매어둘 말이 없음을 너무 허전하여
마음속으로만 울리는 말방울 소릴 듣고
가슴의 빈 구유에서 오랫동안 낡아갈
남은 시절을 생각했다
세상은 이렇게 시들고 마파람 속 홀로 달린다는 것은
갈 곳 아득하여 슬픔의 갈기가 바람을 다해
날린다는 것이냐, 나 혼자는
다 갈 것 같지가 않아 고개 들기가 너무 무거운 날
다시 하늘을 보면 하늘 가득히
빗방울 듣다 말고 듣다 말고 눈발 희끗거리는
그런 날이었다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을 부근 - 정일근  (0) 2016.09.23
소문난 가정식 백반 - 안성덕  (0) 2016.09.20
별이 지는 날 - 박남준  (0) 2016.09.18
목포 - 김사인  (0) 2016.09.17
내가 아주 잘 아는 이야기 4 - 여태천  (0) 2016.09.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