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목포 - 김사인

마루안 2016. 9. 17. 07:35



목포 - 김사인



배는 뜰 수 없다 하고
여관 따뜻한 아랫목에 엎드려
꿈결인 듯 통통배 소리 듣는다.
그 곁으로 끼룩거리며 몰려다닐 갈매기들을 떠올린다.
희고 둥근 배와 붉은 두 발들
그 희고 둥글고 붉은 것들을 뒤에 남기고
햇빛 잘게 부서지는 난바다 쪽
내 졸음의 통통배는 보이지 않는 길을 따라 멀어져간다.


옛 애인은 그런데 이 겨울을 잘 건너고 있을까.
묵은 서랍이나 뒤적거리고 있을지도 모르지, 헐렁한 도꾸리는 입고
희고 둥근 배로 엎드려 테레비를 보다가
붉은 입술 속을 드러낸 채 흰 목을 젖히고 깔깔 웃고 있을지도,
갈매기의 활강처럼 달고 매끄러운 생각들
아내가 알면 혼쭐이 나겠지.
참으려 애쓰다가 끝내 수저를 내려놓고
방문을 탁 닫고 들어갈 게 뻔하지만,
옛날 애인은 잘 있는가
늙어가며 문득 생각키는 것이, 아내여 꼭 나쁘달 일인가.


밖에는 바람 많아 배가 못 뜬다는데
유달산 밑 상보만 한 창문은 햇빛으로 고요하고
나는 이렇게 환한 자부럼 사이로 물길을 낸다.
시린 하늘과 겨울 바다 저쪽
우이도 후박나무숲까지는 가야 하리라.
이제는 허리가 굵어져 한결 든든할 잠의 복판을
저 통통배를 타고 꼭 한번은 가닿아야 하리라
코와 귀가 발갛게 얼어서라도.



*시집, 어린 당나귀 곁에서, 창비









통영 - 김사인



설거지를 마치고
어린 섬들을 안고 어둑하게 돌아앉습니다.
어둠이 하나씩 젖을 물립니다.


저녁비 호젓한 서호시장
김밥좌판을 거두어 인 너우니댁이
도구통같이 튼실한 허리로 끙차, 일어서자


미륵산 비알 올망졸망 누워 계시던 먼촌 처가 할매 할배들께서도
억세고 정겨운 통영 말로 봄장마를 고시랑고시랑 나무라시며
흰 뼈들 다시 접어
끙, 돌아눕는 저녁입니다.


저로 말씀드리면, 이래 봬도
충청도 보은극장 앞에서 한때는 놀던 몸
허리에 걸리는 저기압대에 홀려서
앳된 보슬비 업고 걸려 민주지산 덕유산 지나 지리산 끼고 돌아
진양 산청 진주 남강 훌쩍 건너 단숨에 통영 충렬사까지 들이닥친 속없는 건달입네다만,


어진 막내처제가 있어
형부! 하고 쫓아나올 것 같은 명정골 따뜻한 골목입니다.
동백도 벚꽃도 이젠 지겹고
몸 안쪽 어디선가 씨릉씨릉
여치가 하나 자꾸만 우는 저녁 바다입니다.






# 통영과 목포는 내가 좋아하는 도시다. 김사인의 시가 아니라도 1년에 한 번은 꼭 가고 싶은 곳이다. 터미널에 내리기만 해도 항구에 서서 바다를 바라보기만 해도 여행이 되는 곳, 통영은 가까운 곳에 지인이 있고 목포는 주변 섬 여행을 위한 출발지다. 슬픔을 원천으로 삼은 시인의 고운 심성과  섬세함으로 두 도시가 더욱 빛난다. 그러고 보니 두 도시 다 항구네. 고로 도시는 항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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