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코스모스 삽화 - 조재형

마루안 2016. 9. 12. 01:58



코스모스 삽화 - 조재형



평교리 초등학교 오학년
자전거로 술통을 나르던 초보 배달꾼
아침마다 지각 출항하던 막배를
섬에서 전근 오신 담임은 묵인했다
주인장 행세 야무지던 귀때기 새파란 지배인
아니꼽지만 그이는 공급자 甲
소년은 외상 구매자 乙이었다
상차한 귀로는 외나무다리처럼 등굣길과 겹쳤다.
갓길의 코스모스가 딴전을 피웠다
주름진 신작로는 넘어지기 일쑤
무르팍에 꽃 피면 술병은 몸져눕고 절반은 바닥이 들이켰다
단골집은 꾸지람으로 대물 변상하면 되지만
설핏 마주친 눈빛이 가시처럼 목에 걸렸다
노트 한 권이 오십 원인 애옥살림 시절
억만금이 대체할 수 없는 자존심은 통째 유실되었다
하굣길 산모랑의 선약은 일방 파기했다
그날 이후 선한 눈길은 외면했다
먼길 돌아온 통학 길은 아스팔트로 성형했다
코스모스는 대대손손 갓길을 고수하는데
너무 멀리 나온 자전거는 회항하지 못한다
꿈길 너머 질주하는 신작로



*시집, 지문을 수배하다, 지혜출판








바닥을 읽다 - 조재형



신발 한 켤레에 눈길이 머문다


중환자실까지 동행한 그는 아버지의 최측근, 살을 섞고 살아온 어머니도 가시밭길 진흙탕길 가리지 않은 그를 넘어서지는 못한다


그가 평생 누빈 주무대는 아버지가 맨손으로 일궈 놓은 논두렁 밭두렁 맨바닥 길,


불뚝심으로 쌓은 내력이 밑창에 단단히 등재되었다


황소걸음으로 완독한 발자국 주름마다 고단한 그의 연혁이 층층이 새겨져 있다


노을빛 처마 아래 허허로이 주군을 추념하던 그는, 동행한 중절모 지팡이와 함께 순장행(殉葬行)을 결심한다


소각장 활주로를 이륙한 닳고 닳은 신발, 새 임지인 하늘을 향해 검은 비행운을 띄우며 순항한다


아버지 앞에서는 단 한 번 등을 보이지 않은 그의 생애, 송두리째 던져보지 않은 나는 맨몸으로 독파한 그를 통독하지 못한다


먼 길 칩거에 드신 영정 속의 아버지, 줄곧 등을 보이며 살아온 탕자를 다독이려 맨발로 뛰쳐나오신다






# 조재형 시인은 1963년 전북 부안에서 태어났다. 2011년 <시문학>으로 등단했으며 <함시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검찰청 수사관으로 16여년간 재직했고 현재 전북 부안에서 법무사로 있다. <지문을 수배하다>가 첫 시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