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꽃그늘에 후둑, 빗방울 - 이은규

마루안 2016. 9. 10. 08:12



꽃그늘에 후둑, 빗방울 - 이은규



떠나옴과 떠남이 붐비는 소읍의 터미널
얕은 담장 너머로 백작약 말이 없다


저 꽃의 말은 수줍음이라는데
꽃말마저 버린 꽃의 얼굴처럼
언저리에 머무는 그늘이 희게 시리다


방금 출발한 차편에
반생(半生)이라는 이름의 그가 타고 있다
이제는 지난 생이라 불러야 하나
마음 놓고 수줍을 수도 없었던 때가 길었다
남은 수줍음마저 꽃그늘에 부려두고 가야 할 지금
버리다와 두고 가다 라는 말의 간격이 길다
모퉁이를 막 돌아나가려는 버스
그 순간을 마주하지 못해 고개 돌렸을 때
백작약 거기 있었다, 피었다


말을 버린 것들은 왜 그늘로 말하려는지
끝내 전해지지 못한 말들이
명치그늘로만 숨어들어 맴돈다
허공 속 꽃의 향기가 다만 바람으로 차오를 뿐


모퉁이를 빠져나가던 반생이 손을 흔들 때
나는 배후마저 잃은 하나의 풍경이 된다
마련된 인사가 없는 배웅


순간은 얼마나 긴 영원인가


다시는 배웅할 수 없는 지난 생이
천천히 소실점으로나마 사라지고
아픈 피를 해독한다는 백작약 앞에 선다
꽃그늘에 후둑, 빗방울



*시집, 다정한 호칭, 문학동네








육첩방에 든 알약 - 이은규



멀리서 가까이서
꽃들이 또렷하다는 소식이 전해지는 사이
절기 전에 꽃을 잃는 기억도 있다


문 여닫는 소리만 붐비는 복도
누군가의 늦은 귀가는
다른 방의 조각잠을 깨운 후에야 낡은 구두를 벗고


복도 끝 어둠만이 충만한 방


일용할 양식을 들고
돌아온 손이 스위치를 켠다
벽을 떠난 못의 흔적
그 텅 빈 구멍 속으로 숨어드는 어둠


어젯밤 그은 건 손목이 아니다
작은 방을 채울 수 있을 만큼, 텅 빈 문장을 원한다는 일기의 밑줄이었을 뿐


비밀처럼 밀봉해놓은 꽃씨 대신
양식이 든 봉투를 먼저 펼치면
후두둑 떨어지는 알약들
해가 들지 않아 노랗게 뜬 얼굴처럼, 환한


한 시인은 밤비가 속살거리는 육첩방(六疊房)에서 쉽게 씌여진 시를 썼다


그는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렸지만
오늘의 기다림은 아침처럼 올 시대일까
없는 햇빛 한 줄기로 기지개를 켤 꽃씨일까


속살거리는 밤비 소리도 없이
잠든, 꽃씨 옆에 누워보는 알약 한 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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