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안개와 묘비명과 - 이응준

마루안 2016. 9. 9. 23:57



안개와 묘비명과 - 이응준



무용지물이 되어 버린 추억에게
그 계절들과 그 골목이 있다.


흘러가도 흘러가도 두려운 것은
너를 잃은 내가 고작 나이기 때문이다.


아직 사진이 없었을 적에는
인간의 추억이 이 지경까진 아니었을 텐데


아무리 궁리해 본다 한들
타인보다 낯선 것이 내 뒷모습이다.


묘비명은 단 두 줄.


하루는 지나갔다.
인생은 지루했다.



*이응준 시집, 애인, 민음사








자서전 - 이응준



가수가 어떤 음을 내지 못하는 것은
그 음이 높아서가 아니다


나는 일생을 걸어 다녔지만
빛과 너 외에는
생각하지 않았고 물고기를


닮은 소녀의
아가미 속에 메마른 혀를


밀어 넣었고 올무에 걸려
밤과 밤 저 짐승 모양의
별자리를 올려다 보았다


집은 왜 내 곁에만 서면 기둥과 토대가 무너질까
길은 왜 나를 안기도 전에 눈물로 중무장을 할까


가수가 어떤 음을 내지 못하는 것은
그가 그 음을 아직 모르기 때문이다






# 나는 그를 시인이라 생각하지만 시인과 소설가의 경계가 모호한 사람이 이응준이다. 할 얘기가 많아 시인으로 가두기에는 원고지의 여백이 너무 많은 걸까. 하긴 피카소도 시를 썼거늘 가슴에 고여 있는 예술 에너지가 발산의 경계를 허문다. 모쪼록 좋은 시인으로 남기를 기대한다. 지금도 그는 충분히 좋은 시인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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