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엄마 걱정 - 기형도

마루안 2016. 9. 10. 09:08

 

 

엄마 걱정 - 기형도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 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걸음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시집, 입 속의 검은 잎, 문학과지성사

 

 




비가 2 - 기형도
-붉은 달


1
그대, 아직 내게
무슨 헤어질 여력이 남아 있어 붙들겠는가.
그대여, X자로 단단히 구두끈을 조이는 양복
소매끈에서 무수한 달의 지느러미가 떨어진다.
떠날 사람은 떠난 사람, 그대는 천국으로 떠난다고
장기 두는 식으로 용감히 떠난다고
짧게 말하였다. 하늘나라의 달.

2
너는 이내 돌아서고 나는 미리 준비해둔 깔깔한 슬픔을 껴입고
돌아왔다. 우리 사이 협곡에 꽃힌 수천의 기억의 돛대, 어느 하나에도
걸리지 못하고 사상은 남루한 옷으로 지천을 떠돌고 있다. 아아 난간마다 안개
휘파람의 섬세한 혀만 가볍게 말리우는 거리는
너무도 쉽게 어두워진다. 나의 추상이나 힘겨운 감상 망토속에서
폭퐁주의보는 삐라처럼 날리고 어디선가 툭툭 매듭이 풀리는
소리가 들렸다.어차피 내가 떠나기 전에 이미 나는 혼자였다. 그런데

너는 왜 천국이라고 말하였는지. 네가 떠나는 내부의 유배지는
언제나 푸르고 깊었다. 불더미 속에서 무겁게 터지는 공명의 방
그리하여 도시, 불빛의 사이렌에 썰물처럼 골목을 우회하면
고무줄처럼 먼저 튕겨나와 도망치는그림자를 보면서도 나는
두려움으로 몸을 떨었다.
떨리는 것은 잠과 타종 사이에서 비틀거리는 내 유약한 의식이다.
책갈피 속에서 비명을 지르는 우리들 창백한 유년, 식물채집의 꿈이다.
여름은 누구에게나 무더웠다.

3
잘 가거라, 언제나 마른 손으로 악수를 청하던 그대여
밤새워 호루라기 부는 세상 어느 위치에선가 용감한 꿈 꾸며 살아 있을
그대. 잘 가거라 약기운으로 붉게 얇은 등을 축축이 적시던 헝겊 같은
달빛이여. 초침 부러진 어느 젊은 여름밤이여.
가끔은 시간을 앞질러 골목을 비어져나오면 아,
온통 체온계를 입에 물고 가는 숱한 사람들 어디로 가죠? (꿈을 생포하러)
예? 누가요 (꿈 따위는 없어) 모두 어디로, 천국으로

세상은 온통 크레졸 냄새로 자리잡는다. 누가 떠나든 죽든
우리는 모두가 위대한 혼자였다. 살아 있으라, 누구든 살아 있으라.
턱턱, 짧은 숨 쉬며 내부의 아득한 시간의 숨 신뢰하면서
천국을 믿으면서 혹은 의심하면서 도시, 그 변증의 여름을 벗어나면서.


 

 

# 기형도 시인은 1960년 경기도 옹진 출생으로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고 198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1984년 중앙일보에 입사 정치부와 문화부, 편집부에서 기자 생활을 했다. 1989년 3월 뇌졸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해 유고시집으로 <입 속의 검은 잎>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