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늙은 고슴도치의 고백 - 이선이

마루안 2016. 9. 6. 09:17



늙은 고슴도치의 고백 - 이선이



寒天 너머 언江, 그걸 건너기가 쉬운 일은 아닐세
연산홍빛 눈망울에 생을 내걸고
서리서리 깎아지른 산길 질러질러 내달리면
어디에도 낭떠러지인 돌산
그게 생이었던가 싶네 그려
상처에서 돋아나는 가시를 경멸했지만
그러나 온몸이 가시로 뒤덮힌 나는
한마리 주름진 저주일 뿐


나 또한 생의 어딘엔가 흐르기도 했을
짙푸른 봄강을 건너기도 했지만
한세상 악물었던 어금니
그 어금니 섰던 자리에 고이는
알 수 없는 그리움 같은 것, 분노 같은 것으로
내 가시는 毒을 키우고


그러니 젊은이 보게나
내 가시 끝에 얼마나 많은 애증이 물들었는지
때로는 아팠고, 때로는 아프게 했던 세월의 풍상을
내 어떻게 간직하고 있는지
이제는 아름다울 것 없는 쇠잔한 눈빛 가득
盞(잔)을 채우며
寒天 너머 언江 저편으로 난 길을 내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시집, 서서 우는 마음, 청년정신








오래된 맹세 - 이선이



낡은 사랑으론 生을 건너지 않으련다,며
마음만은 습기찬 세월의 구석방에 유폐시키고
상처난 길을 헤매였노라
길을 상처내면서
공약난발의 세월
사랑이 나를 밝힌다고 애띠게 노래했지만


기억이라는 게 나에게 있었던가, 며 유폐된
저편은 가 닿을 수 없는 곳
항상 통행금지로 막고 섰다


부르턴 발에 걸레신을 신고
한번쯤 이 마음을 버릴 수 있을지


아무것도 아닌 감감한 목마름을 앞세우고
비유로 견디기 힘든 날
맨몸으로 다시 날아오른다, 이번에는
가장 깊이 추락하는 꿈을 꾸리라
낡은 사랑으로 거뜬히 生을 건너는
꿈꿈꿈





# 이선인 시인은 1967년 경남 진양 출생으로 경희대 국문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1991년 <문학사상>으로 등단했다. <서서 우는 마음>이 첫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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