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일몰의 기억들 - 김경미

마루안 2016. 9. 6. 00:51



일몰의 기억들 - 김경미



한사코 감췄던 히아신스 빛깔의 어린 초경날,
맹장염인가 엄마, 처음으로 동네 병원에 데려갔다
의사 웃었다
지독히 못생겨서 사람들이 보기만 하면 자꾸
비웃는 거라고 생각했다


거듭무늬라는 문법용어를 발견한 날,
방송국 화장실 청소아줌마는 여자탤런트로 다시 태어나고 싶다 했다
나는 아줌마로 태어날까봐 두렵다고 말하지 않았다


기차 타고 두 시간 걸려 간 곳, 단지 문 열기 쑥스러워
그냥 돌아왔고 종일 마음 쓰다 간 곳엔 아무도 없었다


매일의 짐작과 성격에 얼마씩을 지불하고 사는지
얼마씩을 벌고 사는지 힐끔 쳐다보다가 들키면
눈 둘 곳이 아무 데도 없었다
후회라기보다는 다만
오늘도 저녁 일몰이 좀 섭섭할 뿐이다



*시집, 고통을 달래는 순서, 창비








봄, 무량사 - 김경미



무량사 가자시네 이제 스물몇살의 기타소리 같은 남자
무엇이든 약속할 수 있어 무엇이든 깨도 좋을 나이
겨자같이 싱싱한 처녀들의 봄에
십년도 더 산 늙은 여자에게 무량사 가자시네
거기 가면 비로소 헤아릴 수 있는 게 있다며


늙은 여자 소녀처럼 벚꽃나무를 헤아리네
흰 벚꽃들 지지 마라, 차라리 얼른 져버려라, 아니,
아니 두 발목 다 가볍고 길게 넘어져라
금세 어둡고 추워질 봄밤의 약속을 내 모르랴


무량사 끝내 혼자 가네 좀 짧게 자른 머리를 차창에
기울이며 봄마다 피고 넘어지는 벚꽃과 발목들의 무량
거기 벌써 여러번 다녀온 늙은 여자 혼자 가네


스물몇살의 처녀, 오십도 넘은 남자에게 무량사 가자
가면 헤아릴 수 있는 게 있다 재촉하던 날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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