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드라미가 있는 뜰 - 송종규
시간이 이룬 겹겹의 구릉들
구릉 아래는 다시 벼랑, 짐승의 아가리.
모래로 꽉 찬 시계
시계를 중심으로 초승달 같은 호수가 숨어 있고
수면을 경계로 대칭을 이룬 갖가지 무늬의 꽃과 모래톱들
그리고, 빽빽한 분홍빛 루머들
많은 생각들이 맨드라미 머리 위를 맴돌았고
많은 시간이
하치장으로 실려 나갔다
문 닫지 마라, 나는 아직 구릉의 한 소절도
읽어내지 못하겠다
다만 한 생애를 끌고 가는 갖가지 얼룩과 냄새들
모래로 꽉 찬, 시계가 걸려 있는
텅 빈, 뜰
*시집, 녹슨 방, 민음사
낡은 의자가 있는 방 - 송종규
수많은 문자들이 손전등처럼
그의 삶을 안내해 주리라 믿었던 세월 건너
햇빛도 없는 방에, 그는 누워 있다
가끔씩, 세상 밖으로 훅하고 날숨을 내보내는 것이
그 남자의 삶 전부인 듯 보인다 누군가, 그는 이미 녹슬었다고
말하지만 그건 정확하지 않다
그가 은밀하게 키워가는 분노와 간교한 문자들을 향해 치솟는
독설의 높이를 안다면, 말라비틀어진 삶
어느 갈피에서 또다시
검은 싹이 돋아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녹슨 나사못처럼 그의 몸이 삐거덕 돌아누울 때
거기, 캄캄한 구들장 아래
깊고 날카로운 균열 하나가 선연하게 새겨진다
# 송종규 시인은 1952년 경북 안동 출생으로 효성여대 약학과를 졸업했다. 1989년 <심상> 신인상을 통해 문단에 나왔다. 시집으로 <그대에게 가는 길처럼>, <고요한 입술>, <정오를 기다리는 텅 빈 접시>, <녹슨 방> 등이 있다. 이름만 보면 남성처럼 보이나 섬세한 시를 쓰는 여성 시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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