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명의를 찾아서 - 김연종

마루안 2016. 9. 4. 19:18



명의를 찾아서 - 김연종



아침 일찍 서둘러도
내 몸은 늘 촉박하다
출근길, 내부 순환도로처럼
꽉 막힌 체증을 뚫기 위해
푸른 신호등 앞 속 편한 내과로 질주한다
그리고 다시 굿모닝 이비인후과에서
한사코 소통을 거부하는 절벽의 귀를 뚫어 보지만
자명종 같은 나의 아침은 공명하지 않는다
마파람 탓일까
속 편한 내과 간호사의 허리처럼
S라인으로 굽은 도로에서
한 번 고개숙인 허리는 펴질 줄 모른다
마파람이 불 때마다
가화만사성을 간판으로 내 건
가화만사성 가정의학과 원장은 바람의 충견이 되라하고
웰빙의원 원장은 불독 같은 아내의 애견이 되라하지만
이 골목 저 골목 빛나는 이마의 명의들은 모두 다
유곽 같은 병원 안으로 들어가 버리고
병원 앞 커피 자판기는 쉴 새 없이 비알씨알 웅얼거리며
알약 처방전을 토해낸다
학문외과는
학문을 하는건지 항문으로 해야 하는건지,
고소공포증이 심해
아내의 배 위에만 올라가도
폐선 엔진처럼 덜덜거리는 나는
공항장애인지 공황장애인지 늘 공황을 일으키고
열린 마음 정신과에서 준 알프라졸람 한 알 먹고나니
아으, 졸린다 졸려,
내일은 이른 새벽부터 좀 더 서둘러야겠다
내 몸에 꽉 맞는
바람의 명의를 찾아



*시집, 히스테리증 히포크라테스, 지혜








비만을 치료하는 비만의사 - 김연종



그는 뚱보의사다 환자들의 비만을 치료하기 위해 그는 기꺼이 뚱보가 되었다 슬픔을 가진 자만이 남을 위로할 수 있고 환자가 되어야만이 비로소 환자들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다는 확고한 신념이 그를 뚱보로 만들었다


그 일이 있기 전까지만 해도 그의 몸은 뱀처럼 날렵했다 하루종일 그가 하는 일이란 드럼통 같은 여자들의 배꼽에 심지를 꼽아 기름덩어리를 흡입하고 송곳니 같은 주사기로 그 자리에 식염수를 주입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턴가 뱀독 같은 식염수가 진짜 뱀독이 되는 바람에 그는 진짜 뱀이 되어 땅바닥을 기기 시작했다 뱃가죽이 자갈밭처럼 울퉁불퉁해진 여자들이 자신의 뱀 같던 옛 모습을 되돌려달라고 아우성치자 그는 뱀을 따라 깊은 동굴로 은닉하고 말았다 그 속에서 그는 악몽처럼 붉은 수수밥을 먹고 동면에 들었다 사족 같은 뱃살이 뒤룩뒤룩 쪄갔다


순식간에 뚱보가 되어버린 그에게 자갈밭 같은 여자들이 도리어 치료를 권했다 자신의 독을 치료하며 환자의 독을 치료하는 일, 그는 다시금 큼지막한 간판을 내걸었다 '비만을 치료하는 비만의사' 그 간판을 본 뒤 그에게 남아있던 몇 사람의 환자마저 발길을 끊었다 오늘도 그는 자신의 삼겹살에 뱀독 같은 요지를 꼽으며 환자들을 기다리고 있다.





# 김연종 시인은 1962년 광주 출생으로 전남대 의과대학을 졸업했다. 2004년 <문학과 경계>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극락강역>, <히스테리증 히포크라테스>가 있다. 김연종 내과 원장으로 있는 의사 시인이다. 읽을수록 묘한 매력에 빠져드는 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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