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정말 살려면 - 황학주

마루안 2016. 9. 1. 08:42



정말 살려면 - 황학주



꾸르륵 우는 새가 몇 마리, 뭉쳐 있다가
하단으로 깨끗한 뱃속을 흐르고 있었다.
일요일,
털이 다 빠진 깊은 상심이 가다가다
막막한 벽에 대고 뒤통수가 까만 울음장치처럼
자기 머리를 건드리며 숨쉬고 있었다.
창 밖엔 황토 바닥 고개를 지나
눈송이 알들이 몇 단락으로 휘몰려 내리고 있었다.


이 부근 더우나 추우나 삶은 열 걸음 안짝이던데
우리의 어두운 골목이 얼마나 사납던가.


파도 한 자락이 바위 뒤로 땅에 처박히는 비명을
당신을 떠난 뒤 내 예리하게 내고 있으면
그만큼 나는 모른다 모른다고 한 죄를 저지르고
이 땅과 내 집을
맑은 날 맑은 정신 없이 드나들었으니 저
금곡리 도리지밭 속에 심은 흰 희망
모질었던 꿈
피어나지 않은 거 믿어지지 않는다고 할 순 없었다.


이제는 네 차례다
태풍권에 나흘 든 미금읍 금곡리
심하게 흔들리는 여관 창
이대로 찬성할 수 없는
말 앞다리처럼 들었다 마구 놓아 버리는 눈보라 속으로
많이 아픈 사람들이 오늘도 처를 울리고
아이들을 울리는데
만날 것이다,
살 부러진 바퀴로 드득드득 나를 다시 부르는 그곳에 갈 때까지
정말 살려면 가난하게 살아서 꼭 가서 사랑한다고 말할 것이다.
당신을 안다고 말할 것이다.



*시집, 사람, 청하출판사








사람 - 황학주



먼 데서 한 순간을 사납게 따르고 와서
앓는 가슴에 겨우 고인 고향의 얼음물 위로
자꾸 떠올려지는
보면 꿈이 바스러지는 눈빛과
너무 흉칙하게 어둔 힘 틀에서
구르며 트이는 저 목소리들을
어떻게 이렇게나 견딜 수 있는 건가.
아직도 버린 입들 때없이 끝없이
너울거리는 얼음판에 변고(變故) 로 찧게 두고
우리들, 다 큰 성대(聲帶)를 뜯어내 가는 시대의 핏물을
잦은 술처럼 어쩌면 삼켜댈 수 있는 건가.


다친 산천은 마음에 잊히지 않고
오래 더럽히며 참는 시간은
칩처럼 마구 지어진다.
밥통과 통하는 창이나 겨우 내고 거기 들어 살고 있는 일이여.
숨통을 끄고, 사람은 거짓으로 숨을 쉴 수 있는 동물이라는 건가.





자서 - 황학주


시외 전화를 걸면, 날마다 어머니는 겨우 잠든다고 말씀하신다. 두 줄기 눈물을 흘리며 나는 불효하므로써 겨우 살고 있다.
<청하>에 감사드린다.
1987년 4월
부안에서 황학주





# 이 시집이 내 책상에 꽂힌 지 30년 가까이 되었다. 미니멀리즘을 실천한다고 많은 것을 정리할 때도 마지막까지 몇 권 남은 시집 중 하나다. 틈틈히 들춰볼 때마다 시인의 고독이 비타민처럼 나를 위로했다. 또박또박 한 줄씩 곱씹으며 공책에 옮기기도 했다. 철없이 세월을 낭비했던 까마득한 날은 훌쩍 건너 뛰어 중년이 되었다. 시 읽는 마음은 여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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