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그 길은 푸른 발자국만 뜯어먹는다 - 허순위

마루안 2016. 8. 29. 02:35



그 길은 푸른 발자국만 뜯어먹는다 - 허순위



외발로 멈추어 선 저녁 계단.
발바닥 밑으로 중력이 바뀌어 간다.
집으로 가는 길이란 말
누군가 공중에 흩뿌려 놓은 포플러 잎사귀들같이
푸들거리는 슬픔과 불안의 공기를 뚫고 멀리
아득하다. 맡은 역의 대사는 아직 못 다 외웠지만,
기나긴 저녁을 두른 내 옷은 툭, 툭 끌러 터진다.
계단 밖의 남자가 운다 못을 박으며
계단 안의 여자가 운다 못을 뽑으며
노란 현기의 즙 발린 이마에
뜨는 햇살마다 조금씩 묻은 피를 훔치고
집으로 가는 길.
부글거리는 거품의 계단에 서서
시계 속에 나른하게 흐르는
어둠의 시침, 배반의 분침 그리고 상실의 초침....
낀 먼지 뽀얗게 떠들어대는
저녁이 긴 창의 집에 돌아가고 싶다.
조금 조금 조석으로 갈아쓰는 안경과 안경 사이
부푸는 시력의 차이만큼
사물의 가장자리 둥글게 휘어지는
안개의 매듭을 풀어 나아가자면
지키지 못한 내 생애의 약속들
계단마다 벽처럼 우뚝우뚝 치솟아 오르지만
집으로 가는 길
그 길은 나의 푸른 발자국만 뜯어먹는다.



*시집, 말라가는 희망, 고려원








말라가는 희망 - 허순위



희망은 몹쓸 년, 혹은 너무 성스러운 아내. 나는 그것에게 속아왔다. 비틀린 긴 시간을 그것은 욕망의 우물 속 깊은 데로 그물에 담아 내린 둥근 수박의 꼴을 하고 차갑게 저장되어 왔던 붉은 속살, 까만 씨앗의 혀, 불구의 남편 내버려둔 채 끝끝내 제 소원 따라 나가 엉망진창인 집도 자식도 내 몰라라 돌아다닌 이제는 제 낯도 일그러져 제 발로 빈 손으로 대문 밖을 나서는

이년아 하필이면 비오는 날이냐, 네 이년 게 섰거라. 아무 말도 못하고 나가는 아내 내다보는 남편의 눈 같은 나의 삶을 휘이 둘러보면 허벅지로 가만히 갖다대던 따뜻한 손바닥의 체온 같은 추억도 없진 않으련만 비 탓이야 비 탓이야 말이 새어나오지 못하는 건. 젖은 세상 타고 기억의 들판으로 드문드문 섰던 꽃나무들 빗방울 뒤켠으로 슥 돌아 들어가고....

팽개쳐 둔 살림살이 곳곳에 분내나는 곰팡이 그년의 영혼마냥 알록델록한 얼룩으로 필 때 사람들은 그것을 외로움이거나 추스려야 할 가난쯤으로 말하며 둘러섰겠지만, 가거라 희망아. 너는 내 삶의 아름다운 화냥년이었더니라.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먼지의 이력서 - 배용제  (0) 2016.08.30
그 저녁의 흐느낌처럼 - 이성목  (0) 2016.08.29
인간의 벼랑 - 백무산   (0) 2016.08.28
맨드라미 손목을 잡고 - 이승희  (0) 2016.08.28
담 - 김만수  (0) 2016.08.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