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담 - 김만수

마루안 2016. 8. 27. 08:30



담 - 김만수



아버지 평생 담을 쌓아 올리는 동안
세상 끄트머리에는 자주 격문이 나붙었다
마루 끝에 발 곧추세워
왕조를 넘어 온
거친 바람의 길을 보았다
따라갈 수 없는 새벽마다 발이 잘리고
바람이 더 세게 다가왔다 스러져가고
잘린 발목이 쌓이던 뒤란에는
촘촘히 붉은 울타리 꽃
명자나무 시린 눈물방울이 피었다 지곤 했다


그 아래서
아령 들며 키를 키운 형은
어느 봄 여자의 담장이 되어 떠나고 나는
해마다 낮아지던 그 가지에 올라
붉은 구호가 팔랑거리는
알록달록한 세상의 하체를 보았다 깊고 높았다


담은 자꾸 낮아져
해체되어 갔고
담을 넘어오던 울렁증, 그 바람주머니와
새들이 찍고 가는 울음의 무늬들이
무너진 흔적 위에 일어서고
열리지 않는 길이 자욱하게 일어서 다가왔다


어디로도 돌아갈 수 없는 길 위로 다시
야트막한 담이 자라나고 있었다



*시집, 바닷가 부족들, 애지








젖 창고 - 김만수



고이지도 흐르지도 않는
죽은 젖이 내게
둘이나 붙어있다
아무것도 흘러오지 않아 출렁거리지도 않는
이제는 납작 갇혀 버린
젖 창고


언제였던가 우습게도
돌지 않는 젖을 기다린 날들이 있었다
멀리서 흘러와 저녁 약속처럼 와 닿는
생젖 흐르는 소리를 기다렸으나
아무것도 고여 들지 않았고
더 깊이 갇혀버린
젖 창고


어머니는 말이 없고
바람소리 가만히 봉해져 있는
그의 낡은 창고가 노을에 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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