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인간의 벼랑 - 백무산

마루안 2016. 8. 28. 20:18



인간의 벼랑 - 백무산



땟국물 전 얼굴로 먼지 속을 놀다 온
글씨 아직 모르던 어린 내 손에 어머니는
작은 쪽지와 돈을 쥐어주셨다


쪼들린 가슴병 깊은 어머니 어쩌면 웃으실까
여름 땡볕을 걸어 먼 신작로를 달음질쳐
검정고무신 안에서는 땀 젖은 발이 연신 미끈거리고
말씀대로 여러 약방을 돌았다


컴컴한 방 구석진 곳에 웅크린 어머니는
어느새 흰옷으로 갈아입고 계셨다
거뭇한 눈자위엔 더 깊은 그림자가 흔들리는 듯했으나
내 머리를 정성껏 쓰다듬어 주시다가
눈을 들어 나를 바라봤을 때 어머니 눈은 그곳에 없엇다
아, 난 너무 일찍 인간의 벼랑을 보고 말았다


나는 볕이 타는 돼지우리 앞 더러운
흙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이웃 사람들이 신도 벗지 않고 어머니 방에 들어갔다
안된대이, 자식을 나두고 이라머 안된대이
이런 약은 누가 사왔노, 울먹이는 소리도 들렸다
나는 돼지들이 미웠다
나는 돼지우리 기둥에 머리통을 쾅쾅 박았다.
돼지들이 꽥괙 고함을 질러댔다.
나는 돼지들을 향해 돌을 던졌다


어머니는 면회실 창밖에 와 계셨다
수번 달린 푸른 옷을 보시자 고개를 돌리셨다
그래, 이제 더 울지 않는대이
니하고 잘살아 보기 전에 절대 안 죽을란다
눈엔 눈물이 흘렀지만 어머니는
첨 웃으시듯 웃고 계셨다



*시집, 인간의 시간, 창작과비평








슬픔의 맞불 - 백무산



또 한차례의 패배가 이 땅을 휩쓸고 가던 날
막다른 골목 어두운 길 돌아서다가
바람 휘감기는 모퉁이에서 나는
바람에 떠 있는 허연 엉덩이와 마주쳤다


골목 앞 허름한 식당에서 일하는 아주머니
실하던 남편 공장 사고로 잃고
현기증 많던 딸아이 하나
아지랑이 따라 집을 나가고
늙도록 계절 없이 혼자 산 여자
넋을 놓고 혼이 빠져 반편이 된 여자
어두운 골목길에서
훌러덩 엉덩이 다 드러내놓고
오줌을 누고 있었다


펑퍼짐하고 허연 살덩이
생산을 끝낸 그 허전한 엉덩이 위로
서늘한 먼지바람이 스치고 있었다
스쳐온 바람이 내 눈으로 들어와
그만 참았던 눈물 흘리고 말았다
생산을 중단한 자의 귀가길이여


오, 그것은 슬픔의 막다른 골목이었다
돌아나올 수밖에 없는 길 없는 길이었다
그것은 슬픔의 맞불
한 슬픔이 다른 슬픔을 꺼버리는
슬픔의 맞불이었다
돌아나올 수밖에 없는
길 없는 길이었다
모든 시작처럼 그렇게 담담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