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맨드라미 손목을 잡고 - 이승희

마루안 2016. 8. 28. 08:27



맨드라미 손목을 잡고 - 이승희



내가 말을 잃고 
고양이처럼 울 때
맨드라미 흰 손목에 그어지던 햇살
칼자국처럼 가늘고 창백했다
내가 골목 끝에 이르러
지나친 집의 주소를 잃고 
떠다닐 때
맨드라미 손목
붉은 피 핥으며 살았다
나 그렇게 견뎠다
녹슬어가는 자전거와 골목 사이 공터에서
맨드라미 손목은 울음 같았고
혼자 그네를 밀고 있는
기다림은
살을 입고, 피가 도는지
한없이 붉어지고
붉은 둘레를 걸어다니며
나 오직 먼지가 되기 위하여
맨드라미 뿌리에 닿기 위하여
폐관하는 저녁
저 물 속 어디쯤 내가 떠나온 자리라고
아무리 돌을 던져도
이제 그만 잠들고 싶다고
굳게 입을 다무는 집
화단처럼 깊어만 지네



*시집, 거짓말처럼 맨드라미가, 문학동네








맨드라미는 지금도 - 이승희



햇살이 가만히 죽은 나무의 머리를 쓰다듬는 동안 나는 죽은 내 얼굴을 만져볼 수 없다는 것이 믿겨지지 않았다. 젖을 물리듯 햇살은 죽은 나무의 둘레를 오래도록 짚어보고, 고스란히 드러난 나무의 뿌리는 칭얼대듯 삐죽 나와 있는 오후. 어떤 열렬한 마음도 이 세상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내가 싸워야 한다면 그 때문. 내가 누군가와 섹스를 한다면 그 때문. 거짓말처럼 내 몸을 지나간 칼자국을 기억하기 때문이 아니다. 우글거리는 상처 따위가 아니다. 맨드라미는 지금도 어디선가 제 키를 키우고 있기 때문이다. 죽은 나를 두고 살아 있는 내가 입을 꾹 다물고 먼지처럼 그릇 위에 쌓여가는 일은 그러므로 아주 서러운 일은 아니다. 이젠 벼랑도 아프지 않다고 생각에 잠긴 귀를 흔들어 보는 일. 입을 벌리면 피가 간지러운 듯 검은 웃음이 햇살 속으로 속속들이 박혀드는 날. 집이 사라지면 골목은 어디로 뛰어내려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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