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먼지의 이력서 - 배용제

마루안 2016. 8. 30. 00:00



먼지의 이력서 - 배용제



책장 구석 수북한 먼지를 쓸어본다
먼지의 살결이 부드럽다
손바닥을 털면
형체도 느낌도 없이 사라질,


오래전 이것도 어떤 사물이었던가
수수억년 전에는
웅장한 바위였거나 여린 풀포기였거나, 혹은
거대한 공룡의 몸으로 포효를 했던가
잠깐씩 반짝이며 흩어지는 저 입자들
전생의 내 몸이었는지 모른다
몇억 년 동안 넓은 공기 속을 날아
영혼의 새로운 집을 찾아오진 않았는지
무수한 원시의 기억들


환영 같은 빛으로 허공에서 아른거리지만
순식간에 펼쳐지는 기호를 나는 해독할 수 없다
아니 누구도 찰나에 대해 의미를 부여할 수 없다
어떤 존재들의 지나온 시간들도
이렇듯 툭,
털어내면 사라지는 반짝거림이다


다시 수억년이 지난 어느 날
먼지들은 또 다른 내가 되어 여기 서 있고
나는 먼지의 입자가 되어
그의 책장 구석에 쌓여 있을 수도 있겠다
아주 잠깐,



*시집, 이 달콤한 감각, 문학과지성








저 별빛 - 배용제



내가 어두워질 때마다 저 별빛
검은 공기를 뚫고 온다
수수억년 전부터 이 순간을 예정하고
무한의 별들에서 눈부신 폭발이 거행되었다
몇만 번의 생성과 소멸을 반복했다


별빛이 몸속으로 반사된다
꿈이 되고 눈물이 된다
그러므로 내 일생은 이미
끝나버린 별빛의 추억일 뿐.
빛의 파편들은 더듬더듬 지표를 흘러 다닌다
생의 충격적인 장면들은
얼마나 오래전에 준비된 필름들이었는지
어느 별이 무서운 직립보행의 흔적을 남겼는지
서서 안전한 내 모습에 소스라친다


젖은 식탁에서 밥을 먹고,
격렬한 축제를 벌이고, 고음의 노래를 흥얼거리고,
차를 몰고 함부로 거리를 통과하다가
어둠 속 실체를 드러내는 저 별빛들
또 어느 별이었을까, 세상의 역사와는 너무도 무관하게
허물어지는 빛의 정체는
그러나 제 몫의 생애를 완벽하게 재생하는 일이다
뒷골목의 블랙홀로 빨려드는 것,
갑작스레 응급실에 실려가며 헐떡이는 것,
때로 빌딩 꼭대기에서 추락하는 것,
그러한 반짝임도
상상할 수 없이 먼 시간과 까마득한 어둠을 뚫고 왔다
어떤 뜻밖의 장면조차 눈부시다


오늘 낮 몸속에서 천년 묵은 눈물이
반짝이며 울었고
어제는 만년된 별빛 하나가 꿈을 꾸었다
일년 전이던가, 억년쯤된 경험의 고통이
반짝이며 나를 끌고 다녔다
잠깐씩 진저리치는 내 공포는 장엄하다


저 별빛, 끊임없이 또 다른 나를 복사해내는 어둠 속,






# 배용제 시인은 1963년 전북 정읍 출생으로 서강대 신무방송학과를 졸업하고 서울 예술신학대 기독문학과를 수학했다. 199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시집 <삼류극장에서의 한때>, <이 달콤한 감각>, <다정>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