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고통의 역사 - 이현승

마루안 2016. 8. 27. 00:10



고통의 역사 - 이현승



악을 쓰고 역기를 들어 올리는 사람의 얼굴로
꽃은 핀다. 실핏줄이 낱낱이 터진 얼굴로 아내는
산모 휴게실에 혼자 차갑게 식어 누워 있었다.


죽자고 벌인 사투의 끝은 죽음 같았다.
있는 힘을 다 뽑아낸 몸은 죽은 거나 다름없었다.
뼈마디까지 낱낱이 해쳐진 몸으로 까맣게 가라앉았다.


백일홍 백일 동안 핀다고 누가 그랬나.
백일홍은 백일 동안 지는 꽃이다.
꽃은 떨어져내려 천천히 색이 시들고
그 곁에서 매미가 악을 쓰고 우는
백일은 얼마나 긴가.
어혈이 빠지기도 전에 다시 어혈을 입는
백일은 얼마나 더딘가.


먼바다는 아이들이 가라앉아 아직 시퍼렇고
사람 죽는 소리에 질린 하늘 아래
백일 동안 멍든 얼굴로 누운 그늘을 보면서
생각한다. 용서가 먼저인지 망각이 먼저인지.
견디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견딤에 대해.


사람들이 곡기를 끊고 시나브로 제 생을 말리는
이곳은 어디인가.
죽은 사람이 떠나지 못하는 세상은 구천 같다.
세월은 더 흘릴 눈물도 없는 사람들을 울려서 눈물을 짜낸다.
사람이, 역기를 들어 올리는 사람의 얼굴로 간신히.



*시집, 생활이라는 생각, 창비








오줌의 색 - 이현승 



아픈 사람을 빨리 알아보는 건 아픈 사람,
호되게 아파 본 사람이다.
한 사나흘 누웠다가 일어나니
세상의 반은 아픈 사람,
안 아픈 사람이 없다.


정작 아픈 사람은 한 손으로 링거 들고
다른 손으로는 바지춤을 잡고
절뚝절뚝 화장실로 발을 끄는데
화장실 밖 복도엔 다녀온 건지 기다리는 건지
그 사람도 눈꺼풀이 무겁다.


방금 누고 온 오줌과 색이 똑같은
샛노란 링거액들은 대롱대롱 흔들리고
통증과 피로의 색이 저렇듯 누렇겠지 싶은데
몽롱한 눈으로 링거병을 보고 있자니
위로받아야 할 사람이 위로도 잘한다는 생각.
링거병이 따뜻하게도 보이는 것 같다.





# 이현승 시인은 1973년 전남 광양 출생으로 고려대 대학원 국문과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2002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에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시집으로 <아이스크림과 늑대>, <친애하는 사물들>, <생활이라는 생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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