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돌배나무 - 손수진

마루안 2016. 8. 26. 08:23



돌배나무 - 손수진



언제부터 있었을까 저 사내
길게 누운 그림자 젖어 있네
지난밤 그 여자 악을 쓰며 울고 간 뒤
빈 벽에 기대어 눈물 같은 소주로 병나발 불던
삐걱거리던 밤도 가고,


얼마나 아팠으면
제 가슴 살점 뜯어내어
길바닥에 흩뿌리고 저토록 몸부림을 쳤던 걸까
팔이 부러졌네, 떨어진 푸른 살점 바람이 쓸고 가네
버틸 수 없는 한계에서 사랑을 놓고 쓰러지네


땅에서 한번도 발을 빼본 적 없는 돌배 같은 사내
배꽃같이 웃던 색시 하나 얻어 겨우 한철을 살더니
그 여자, 배꽃같이 흰 살결 가진 그 여자
천한 종자는 싫다며, 발에 흙 묻히고 사는 것은 더욱 싫다며
셀비어처럼 붉은 입술 옴죽거리며 앙칼지게 쏘아붙이고 간 다음날
평생 흙에서 발 한번 빼본 적 없는 그 사내
스스로 빼낸 흙 묻은 발 가지런히 모로 세우고
그림자처럼 누워 있네



*시집, 붉은 여우, 한국문연








그 남자 - 손수진

 


노을색 천막이
사람의 얼굴도 치자 빛으로 물들게 하는 저녁
잘려서도 꿈틀거리는 낙지발을 씹으며
소주잔을 들어 목으로 털어 넣는 남자
스무고개를 하듯
앞에 앉은 사람에게 묻는다
- 손가락 한 개로 뭐든 다 할 수 있어
한 가지만 빼고
그게 뭔 줄 아는가?
마주 앉은 사람의 눈빛이
잠시 바다처럼 출렁인다
그리곤 빈 술잔을 채워주며
통발 걷어 올리다 잘려나간
탁자 위에 올려진 그의 엄지뿐인 오른손을 본다
- 그건 말이야
와이셔츠 소매 단추 잠그는 일이야
그럴 일 별로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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