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잠의 힘으로 가는 버스 - 김명인

마루안 2016. 8. 23. 23:37



잠의 힘으로 가는 버스 - 김명인



이 의자의 주인들은
왜 한결같이 半睡 속으로 빠져드는가
둘러보면 등받이 아래로는 가라앉지 않으려고
수면 위의 잠 필사적으로 붙들고 있다
옆 좌석 박선생은 아예 의자를 젖혀놓고
수심 속으로 파묻히는 고개
가까스로 걸쳐놓았다 통로 건너
이선생은 수족관 유리벽인 듯 이마로
연신 차창을 쪼아댄다 그 곁 김선생은 어제 저녁
술자리에서의 잔상 잠의 반숙으로 데쳐내는 듯
고개 꼿꼿이 세운 채 눈을 꼭 감고 있다
뒷자리 정선생은 미처 챙기지 못한 새벽밥
꿈속으로 먹고 있는가 차가 덜컹거릴 때마다
입맛 쩝쩝 다시네
이 버스는 시간 반의 출근길을
고속도로 위로 옮겨놓는 중이지만
의자에 앉자마자 저들을 수면 속으로 끌어당기는 것은
턱없이 짧았던 간밤이 아니리라
턱주가리로 흘러넘치는 코골이나 게걸스러운 침도
목적지까지 그날치의 자맥질을 옮겨놓는
가릉거리는 엔진 소리나 가솔린처럼 여겨지니
이 차는, 잠의 힘으로 가고 있다!



*시집, 파문, 문학과지성








따뜻한 적막 - 김명인



아직은 제 풍경을 거둘 때 아니라는 듯
들판에서 산 쪽을 보면 그쪽 기슭이
환한 저녁의 깊숙한 바깥이 되어 있다
어딘가 활활 불 피운 단풍 숲 있어 그 불 곁으로
새들 자꾸만 날아가는가
늦가을이라면 어느새 꺼져버린 불씨도 있으니
그 먼 데까지 지쳐서 언 발 적신들
녹이지 못하는 울음소리 오래오래 오한에 떨리라
새 날갯짓으로 시절을 분간하는 것은
앞서 걸어간 해와 뒤미처 당도하는 달이
지척 간에 얼룩 지우는 파문이 가을의 심금임을
비로소 깨닫는 일
하여 바삐 집으로 돌아가면서도
같은 하늘에서 함께 부스럭대는 해와 달을
밤과 죽음의 근심 밖으로 잠깐 튕겨두어도 좋겠다
조금 일찍 당도한 오늘 저녁의 서리가
남은 온기를 다 덮지 못한다면
구들장 한 뼘 넓이만큼 마음을 덥혀놓고
눈물 글썽거리더라도 들판 저쪽을
캄캄해질 때까지 바라봐야 하지 않겠느냐





# 파문이라는 시집 제목을 이 시에서 따왔다. 나는 별 걸 다 기억하는 독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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