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퇴직을 하며 - 홍신선

마루안 2016. 8. 25. 09:09

 

 

퇴직을 하며 - 홍신선


얼마나 범속한 재능에 속고 속아왔는가
얼마나 열정에만 눈멀어 마련 없이 달려왔는가
그동안 나는
허공에서 허공을 꺼내듯
시간 속에서 숱한 시간들을 말감고처럼 되질로 퍼내었다
말들을 끝없이 혹사시켰다.
아직도 미뤄둔 잔업처럼 방치해놓은
독자도 없는 시들을
폐농지처럼 황량한 그 내부 문맥들을 폐관하는 일
처자식 입에 풀 바르느라
이골 난 호구질에 늘 무릎 꿇었던 일
막 나주볕들이 제 심중에 돋우고 있는 심지 끝에
막바지 불똥처럼 해밝게 앉는
지난 시간 초심이나 되돌아보는 일
······
이제 다시
어디에다 무릎 꿇고 환멸의
더 깊은 이마 조아려야 하는가


*시집, 우연을 점 찍다, 문학과지성사

 

 

 

 

 

 

처서 부근에서 - 홍신선


처서 지나 멀쩡한 푸나무들 안에서
누가 자동 펌프라도 끄는지
밤낮으로 푸르르 푸,르,르 시동 꺼지는 소리 들린다
일대에는 휘발하는 목숨들의 통랑한 냄새 진동한다
전원 플러그 뽑고 샘물 바닥 깊이
머리통 쑤셔 박고 쿨럭쿨럭 마지막 물켜는
흡입구 호스 그것도 사려 얹고
여름내 퍼 돌리던 심장 속 양수기 철거한다
길 넘게 퍼 올렸던 수액들도 화물승강기 덜컹대며 내려가듯
물 도관을 되돌아 내려간다
고장난 부속들과 반벨*같은 독약들도 몇 푸대씩 싣고
처서 부근에서
주춤주춤 내려간다
늙음이란 하루하루 지하로 철수하는 일
폐허인 내면을 폐쇄하는 일
그렇다 더 멀고 험한 길 준비에
제 몸 깊이 살아온 시간을 거두어 들이는
풀과 나무들
건설 현장 화물 승강기처럼 늦여름을
밤낮으로 무릎 관절 밑으로 실어내리고 있다
그 노역에 등 벗겨진 둑 밑의 항가새 하나
눈알만 유난히 붉은 날


*농약,제초제의 일종

 

 

 

 

# 홍신선 시인은 1944년 경기도 화성 출생으로 동국대 국문과,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1965년 <시문학> 추천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서벽당집>, <겨울섬>, <우리 이웃 사람들>, <다시 고향에서>, <황사바람 속에서>, <우연을 점찍다>, <자화상을 위하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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