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구겨지고 나서야 - 유병록

마루안 2016. 8. 22. 05:37



구겨지고 나서야 - 유병록



바람에 떠밀려 굴러다니던 종이가 멈춰선다 무엇을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으로


세계의 비밀을 누설하리라 다짐하던 때를 떠올렸을까 검은 뼈가 자라듯 새겨지던 순간이 어른거렸을까 뼈를 부러뜨리던 완력이 기억났을까 


구겨지고 나서야 처음으로 허공을 소유한 지금은 안에서 차오르는 어둠을 응시하고 있을까


안쪽에 이런 문장이 구겨져 있을지 모른다
빛의 속도를 따라잡으면 시간을 거스를 수 있지만 어둠은 시간의 죽음, 그 부피를 측량하면 시간을 지울 수 있을 것....


문장을 완성한 후에 의미를 깨달은 것처럼


종이는 상처를 끌어안은 채 잔뜩 웅크리고 있다 내 눈동자에서 어떤 적의를 발견한 듯이


구겨진 몸을 다시 펼치지 말라는 듯이 품 안에서 겨우 잠든 어둠을 깨우지 말라달라는 듯이



*시집, 목숨이 두근거릴 때마다, 창비








북치는 사내 - 유병록



때리면 운다. 그런 점에서
인간은 타악기처럼 다루어야 한다는 음악론을 펼치며
사내가 연주를 시작한다
온몸으로 우는 것이 타악기의 윤리이듯
여자가 갓 만든 북처럼 둔탁하게 울린다
두드릴 때마다
더 깊은 곳에서 소리가 흘러나온다
질 좋은 가죽이란 숱한 무두질 끝에 완성되는 법
북으로 말씀 드리자면
사나운 짐승의 가죽일수록 깊은 소리를 낸답니다
뜨거운 울음을 삼킨 가죽만이
음악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죠
아름다운 소리를 얻을 때까지 더 세게 더 경쾌하게
북을 치는 사내


다들 안심하세요
능숙한 연주자는 가죽을 찢는 법이 없으니까요
찢어진다 해도 짐승 따위는 얼마든지 있답니다






# 유병록 시인은 1982년 충북 옥천 출생으로 고려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201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목숨이 두근거릴 때마다>가 첫 시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