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나이는 무덤을 닮아간다 - 김하경

마루안 2016. 8. 23. 08:50



나이는 무덤을 닮아간다 - 김하경



날이 가고 달이 차오르는 아침
햇살의 체온이 따스하다
나이만큼 허리를 쥐어짠 듯 등 굽은 노인
근육주사 한 대에 병원 문을 나선다


오동나무보다 가벼운 엉덩이에 주사자국
봉분처럼 부풀었고
근육 속에 번진 효과가
오늘이 뒤섞여 내일의 무덤으로 퍼진다


소라게 한 마리 집을 이고 길을 가듯
진통제 하나의 힘으로
봉분 하나 가볍게 허리에 메고 오늘을 산다


나이는 무덤을 닮아 0으로 되돌아가고
삶의 견적서도 0으로 청구된다


욱신거리는 통증이 엉덩이에 잠시 머물다가
건너편에서 윙윙거린다
끊어질 듯 넘어질 듯 길을 나서
힐끔힐끔 중앙선을 넘겨다보는 날


혼자 오래도록 시간을 다듬었던 둥근 해는
빨리 끝낼 수 없는 나이에 진통제를 찌른다


힘을 실은 바람
약효보다 먼저 온몸에 퍼질 때
노인의 주름진 이마엔
햇빛이 잠시 머물다 오후가 그늘진다



*시집, 거미의 전술, 고요아침








미래도 - 김하경



시간이 하얗게 샌 오후
시장통 앉은 할머니는 늙은 호박을 박박 긁어내린다
아직 덜 여문 껍데기들 축축이 벗겨져
숟가락 아래 가묘 하나 수북하다
이제 더 이상 할 말 없는 애호박을 보고
꽉 다문 입
마음속에 무덤 하나 풀어 놓는 건가
살점이 뚝뚝 떨어져도 깎아내고 있다
방울방울 진액이 맺힌 뜯겨진 살점
검은 머리가 하얗게 샌 늙은 호박 위로
진액이 눈물처럼 가묘 아래로 잔뜩 흐른다
코걸이가 대롱대롱한 아마존의 여인들도 마찬가지다
누런 호박은 밥이고 무덤이지만
흰머리로 늙은 시간은 여인들의 축축한 눈물인 것을
TV 속의 군데군데 이 빠진 아마존 여인들
푹 익은 호박죽 한 숟가락 받아먹을 줄 모르고 있다
암흑은 답답한 속마음이 끓어오르는 것이어서 꼭꼭 씹어 삼켜야 하는 것
덜 여문 애호박의 껍데기들은 누렇게 말라비틀어진 눈물인 것
고무대야 속에 제 무덤을 다독다독 미래도를 조각하는 것
검은 머리가 흰머리로 기울어진 지금
끈끈한 진액이 여인들의 밑거름이었던 눈물이
반대쪽으로 떨어진 노을의 끝물은 더 붉다
작고 힘없는 그림자가 시장통 서쪽으로 기우뚱하다
바싹 늙은 할머니가 삼베 치마로 침을 닦고
숟가락 위에 누런 호박
봉분 한 삽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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