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부드러운 산소 - 박승민

마루안 2016. 8. 21. 21:53

 

 

부드러운 산소 - 박승민


약 기운에 쓰러져 잠든 아이의 손을 꼭 잡는다
아이의 손이 내 손을 찾는다

"엄마, 돈 벌면 아빠 다-줘-이 씨!
"앞으로 내 이름은 그레고리오야"
이 말을 끝으로 아이는 말문을 닫았다

양파껍질을 벗기듯
하루씩, 꼭 하루씩, 빠르게 지구의 껍질을 벗기며
아주 편안하게 숨 쉴 수 있는 곳으로 가고 싶은가 보다
지구는 아무래도 산소가 부족한가 보다

허기사 누군들 아침에 입던 옷을 접어
머리맡에 수의처럼 놓고 잠들지 않은 밤이 있으랴

네가 벗기다만 껍질을 마저 벗기며
나 또한 하루하루 가벼워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주에는 부드러운 산소(山所)가 아주 많을 것 같다


*시집, 지붕의 등뼈, 푸른사상사

 

 

 

 


아버지와 아들 - 박승민


봄이 오자 그 도시에는 국회의원 선거가 있었고
공안검사 출신이 당선되었다
사람들은 막걸리 한 잔도 없다고 푸념을 했지만
황사바람 속에서도 잽싸게 등 뒤에 줄을 섰다

아이는 걷는 속도가 점점 느려졌다

마음의 수은주가 하한가를 치는 밤마다 강가로 나갔다
좀 더 견딜 수 없을 때면 강바닥까지 내려가
허리띠를 잔뜩 졸라맨 강물 소리를 들었다
알 수 없는 방언들이 가슴을 쳤다

가끔 길에서 마주치는 서울대 나온 친구는 자꾸 살이 쪘다
"이건 살이 아니야 술이야"
수도승처럼 머리를 밀고 배낭을 멘 그는 
허공의 칡넝쿨처럼 벼랑 끝으로 가고 있었다

아이는 방안에만 누워 있기 시작했다

이 세상에 우연 아닌 것이 어디 있을까
인간이 무엇을 예측할 수 있을까
그는 대답도 없는 질문을 혼자 하는 버릇이 생겼다
시간의 고무줄이 너무 빨리 당겨지고 있었다
누가 먼저 내리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생(生)은 어차피 낯선 여인숙에 들러 
누군가 죽어나간 이불위에서 
생시처럼 일박(一泊)하는 것

아이는 갱도 같은 식도가 점점 막히기 시작했다



 

*시인의 말

폐경기 앞둔 여자가 첫 애를 낳는 심정이다.
내가 사산(死産)한 세월이 주마등같다.
흑심(黑心)을 품은 연필 한 자루로 이 세상에 해당한다는 것이
무모함을 넘어
덧없음을 아는 나이

그럼에도
내 의사와는 전혀 상관없이
흰 물갈기를 보무도 당당히 날리며
낯선 시간들이 자꾸 혹등고래처럼 몰려온다.

이쯤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심곡(深谷)의 발원지처럼 눈이 좀 더 깊어져야겠다.
담금질을 약간 과하게 해봐야겠다.
이젠 나를 들이박고 간 모든 과실범들을 스펀지처럼 슬쩍 껴안아봐야겠다.

내 아들 그레고리오에게
이 구석기적 문자를 바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