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빛 속에서 이룰 수 없는 일은 얼마나 많았던가 - 허수경

마루안 2016. 8. 20. 08:18



빛 속에서 이룰 수 없는 일은 얼마나 많았던가 - 허수경


 
빛 속에서 이룰 수 있는 일은 얼마나 많았던가 이를테면 시간을 거슬러 가는 일, 시간을 거슬러 가서 평행의 우주까지 가는 일


그곳에서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태어나지 않는다
그곳에서 나는 내 어머니에게서 태어나지 않는다
나는 다른 부모를 가지고 다른 이름을 가지고
내 육체는 내가 가진 다른 이름을 이루어내고


그곳에서 흰 빛의 남자들은 검은 빛의 여자들에게 먹히고
(그러니까 내가 살던 다른 평행에서는 거꾸로였어요, 검은 빛의 여자를 먹는 흰 빛의 거룩한 남자들이 두고 온 고향으로 돌아가는 꿈을 자꾸 꾸며 우는 곳이었지요)
나는 내가 버렸던 헌 고무신 안에
지붕 없는 집을 짓고 무력한 그리움과 동거하며
또 평행의 우주를 꿈꾸는데


그러나 그때마다 저 너머 다른 평행에 살던 당신을 다시 만나는 건 왜일까

그건 좌절인데 이룬 사랑만큼 좌절인데
하하, 우주의 성긴 구멍들이
다 나를 담은 평행의 우주를 가지고 있다면


빛 속에서 이룰 수 없는 일은 얼마나 많았던가 이를테면 시간을 거슬러 가서 아무것도 만나지 못하던 일, 평행의 우주를 단 한 번도 확인할 수 없던 일

 


*시집, 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 문학과지성

 

 






공항에서 - 허수경

 


기다림만이 내 영혼의 물 속을 헤적이는 날
당신이 언젠가 들렀을 것만 같은 공항으로 간다


기차나 배를 타고 오기에도
버스는 더욱더 안 될 어스름한 저편에 서서
기다린다 당신이 오는 발자욱마다 손가락이 돋아나
지그시 누르는 자리마다 멍이 든다


밥 11시 24분 비행기가 도착하고
새벽 02시 55분 비행기가 떠날 때
전광판에는 도착하는 비행기와 떠나는 비행기가
검은 눈빛처럼 반짝인다


모든 길은 거짓이고 또한 그림자 같아서
백 년을 살아도 낯설 고향의 새벽 공항에 앉아
아주 조금 술을 마신다


당신의 얼굴은 떠오르지 않고
목소리도 마치 전생의 무늬 같다
취기만이 당신인 것처럼 곁에 앉았는데
많이 잘해주지 못해서 마음은 비었고
많이 안아주지 못해서 손도 비었다
꼭 내가 당신을 배반한 것 같다


우리 모두 다만 기어이 가야 할 곳으로 떠난다
산으로 바다로 항구의 젖은 가슴에게로
그래서 이 지구에는 기다림에 살이 아픈
사람들이 사는 마을이 있고
마을에는 연인을 지켜주는 방도 있다
그래서 나무들은 조금씩 키가 자라고
잎들은 조금씩 빛을 해에게 내준다


어제는 당신이 나를 더 기다렸고
오늘은 내가 당신을 더 기다린다
그것만이 농담이 아닌 이국의 공항에서
상냥한 벗인 취기에게 말한다
사랑하는 사람아, 당신을 기다리면서 물들면서
나는 이 세상 속, 어떤 예쁜 사람이 되어
사라져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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