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세기의 서커스 - 곽효환

마루안 2016. 8. 19. 07:49



세기의 서커스 - 곽효환



인적 드문 외진 공터에 겨울비는 내리고
대형천막 가설무대,
국내 최고이자 유일한 서커스단의 세계적인 묘기는
이렇게 환상적이고 아슬아슬하게 시작되지
매일


브라운관과 스크린을 주름잡았던
수많은 별들이 이곳을 거쳐 갔지
지금은 인터내셔널이야
최초, 유일의 중국국립기예단과의 합동 공연
곡예의 대부분은 중국 몫이지
우린 한중합작이거든
재미없으면 전액 환불, 이것이 우리의 모토야


열 살,
줄을 타고 그네를 타기 시작했어 점점 높은 곳에서
그때부터 혼자였거든
그래도 외롭진 않았어 지금처럼
스무 살,
오늘의 레퍼토리는 외발 자전거 위의 저글링
이 미터 높이의 안장에 앉아 여러 개의 원반을 수없이 던져 올리고 받는
하늘 높이 올려도 올려도 돌아오는 원반, 그게 나야
서른 살,
외로워 숨어 울던 나를 달래던
돈을 찾아 건설 현장에라도 가겠다던
이곳에서 만난 오빠는
이제 밤무대 가순지 차력산지를 한 대
아니야 모르겠어 그날 후로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마흔 살,
까마득한 무대 꼭대기에서 하늘다람쥐 같은 비상
그리고 몇 번이고 멋들어진 공중제비를 돌던
그네타기 삼촌은 매표소에서 표를 팔지
질퍽해진 공터를 지키는 그는
지금도 하늘을 날고 싶어 해
쉰 살,
이모는 지금도 가끔 무대에 올라 아니 오르고 싶어해
의자탑쌓기와 강아지원통돌리기가 특기야
요즘 텅 빈 컨테이너박스에서의 궁상이 부쩍 늘었어 오늘은
지루한 패떼기에 엉덩이가 무거워진 그녀와 고스톱 한판 쳐줄까도 싶어


그 다음엔 몰라
곡예사에게 내일 일은 모르는거야
사랑 같은 건 필요 없어, 스무 살
사랑, 아니 필요할지도 모르지


삶도 겨울 들판처럼 비워둘 수 있으면 좋겠어
낡고 초라하게 시드는 꽃도 나름 아름답잖아
떠돌면서 날마다 피고 지는 꽃
하루의 꽃


*시집, 지도에 없는 집, 문학과지성








앞서 간 사람들의 길 - 곽효환



칠흑의 길을 앞서 간 이들을 따라
바다를 닮은 호수를 품은 내륙 도시를 지난다
호반을 둘러싼 아름드리  오동나무
굽고 비틀리고 휘어진 굵은 가지 마디마디
먼저 이 길을 간 사람들의 삶이 그랬을지니
더디게 더디게 오는 여름 저녁놀 아래서
편지를 쓴다, 누군가 꼭 한 번 읽어줄


엉엉 울며 혹은 눈물을 삼키며
그렇게 걸어간 사람들에 대하여
그 슬픈 그늘에 대하여


상해 가흥 무한 남경 그리고 중경
한 발짝도 내다볼 수 없는
농무 자욱한 길을 더듬으며
사랑하는 이를 위해 일기를 쓴 사람,
토굴에 웅크려 떨며 누군가를 기다리던 사람,
다시 그날이 와도 숙명처럼
그 길을 묵묵히 갈 사람들에게
철 이른 들국화라도 만나면
물소리, 새소리, 벌레소리, 아이들 재잘거리는
소리를 담아 가만히 들꽃 소식과 함께
바람에 실어 보내리니


고맙다고
고마웠다고
그래서 나 오늘 다시 이 길을 간다고
무심히 여름 벌판을 적시는 강물에도 길이 있다고
길 너머 다시 길이 있다고





# 곽효환 시인은 1967년 전북 전주 출생으로 건국대 국문과와 고려대 대학원 국문과를 졸업했다. 1996년 세계일보, 2002년 <시평>에 시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인디오 여인>, <지도에 없는 집>, <슬픔의 뼈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