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오래된 취미 - 이현호

마루안 2016. 8. 8. 02:05



오래된 취미 - 이현호



기지개를 켠다
창밖 길 건너 장례식장은 불이 꺼졌다
몸이 추처럼 무거운 건 아무래도 익숙해지지 않는 울음소리가
젖은 신문지처럼 꿈에 들러붙었기 때문
흙갈이를 해줘야지 생각한 지 서너 해가 되었는데
밤새 화분 위로 낯모르는 색이 피었다
전화를 걸어야지 했는데 주전자 물 끓는 소리에
그만 어제인 듯 잊었다
"한 발은 무덤에 두고 다른 한 발은 춤추면서 아직 이렇게 걷고 있다네."
검은 나비들이 쏟아져 나온다, 미뤄뒀던 책을 펼치자
창을 넘지 못하는 나비들, 그 검은
하품을 할 때, 느른한 음색 속으로 등걸잠 같은 생이 다 들었다


나는 살고 있고, 내가 살아가도록 내버려두었다
삶을 취미로 한 지 오래되었다
 


*큰따옴표 부분은 에두아르도 갈레아노의 <시간의 목소리>에서.

*시집, 라이터 좀 빌립시다, 문학동네








벤치 - 이현호



내 방에는 벤치가 있다
안에 있는 바깥이고 겉을 둘러싼 속이다
외출하지 않은 지 오래되었다


어제의 마음과 오늘의 마음이 달라서
우리는 매일 죽고 다시 난다
벤치는 늘 죽은 나로 비좁다


왜 그러고 살아
그러고 사는 게 아니라 살려니 그러는 거지
나였던 나와 나였었던 나의 담소는 마른 화초처럼 권태롭다
다행히 그들은 음악을 애호하는 취향이 같다


남향의 집에는 귤빛 볕이 가득하고
벤치의 나와 나는 서로 어깨에 기대 선잠에 든다
나와 내가 장난인 듯 벤치를 집밖으로 들어 옮기려 한다
하지만 벤치는 식물성이고 뿌리가 깊다
우리 중 누군가 몰래 물을 주고 있다


나로서의 기억도 잊은 오래된 나는, 오늘도
"네가 있어서, 나는 내가 찾아 헤매던 것이 너인 줄 알았다"
라는 문장의 뒤를 잇지 못한다
이제 나는 거의 벤치와 하나가 되었다


벤치의 발치에 누워 빤한 운명을 긍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지 않은 때가 있었던가.
내일이면 벤치는 더욱 비좁겠지만
우리는 모두 벤치를 사랑할 것이 분명하다


그가 벤치에 앉기 전 잃어버린 문장은 무엇이었을까
벤치는 열린 결말처럼






# 이현호 시인은 1983년 충남 연기군 전의 출생으로 2007년 <현대시> 신인상을 수상하며 문단에 나왔다<라이터 좀 빌립시다>가 첫 시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