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항문(肛門)에 대하여 - 최희철

마루안 2016. 8. 7. 19:25



항문(肛門)에 대하여 - 최희철



우연히 딸애의 똥을 닦아주다
항문이
꽃잎보다 아름다울 수 있다는 걸 알았다.


그건 세상의 출구
마치 봉제인형의 마무리 작업 같은
주름이 잡혀 있지
끝없이 존재를 만나다 보면
우주의 끝도 이렇듯 주름이 있을까.


부드러운 힘으로
온갖 부스러기들을 되살려내는
경이로운 생산에 대해
할 말을 잃을 뿐.


비관론자들은
그것이
늘 어둡고 칙칙하다고
불평하지
하지만 항문만큼
세상의 비계를 보기 좋게
조절해줄 수 있는 게 있을까.


변함없이 되돌려놓기에
무엇을 삼켰는지 알게 되고
항문이 성실하기에
우린 곤히 잠들 수 있다.



*시집, 영화처럼, 푸른사상








남성 - 최희철



아주 어릴 적 아버지의 남성을 본 적이 있다. 어둠 속에서 그것은 아버지와 함께 잠들어 있었는데, 작은 동물 같은 그것을 만져보았다. 따뜻했다. 어렴풋한 장면들, 검열 받은 꿈은 다 지워져버렸는데, 꼭 그만큼의 크기를 갖게 된 지금의 내가 기억해보건데, 아버지의 남성은 당시 가족을 먹여 살리던 힘의 저장고였음이 분명하다. 단단한 고집으로 암컷을 제압하고, 집안의 늙은 것과 어린 것을 보호하거나 키워낸 거대한 뿌리, 야만스런 욕구였던 것이다. 이제 단지 내 차례일 뿐이다.






# 최희철 시인은 1961년 부산 출생으로 부산수산대학(현 부경대) 어업학과를 졸업했다. 1984년부터 7년 간 원양어선 및 상선 항해사로 근무했다. 1982년 <향파문학상> 수상과 2005년 <인터넷문학상> 시 부문에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영화처럼>이 첫 시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