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용대리에서 보낸 가을 - 이상국

마루안 2016. 8. 7. 23:53



용대리에서 보낸 가을 - 이상국



면에서 심은 코스모스 길로
꽁지머리 젊은 여자들이 달리기를 한다
그들이 지나가면 그리운 냄새가 난다
마가목 붉은 열매들이 따라가보지만
올해도 세월은 그들을 넘어간다
나는 늘 다른 사람이 되고자 했으나
여름이 또 가고 나니까
민박집 간판처럼 허술하게
떠내려가다 걸린 나뭇등걸처럼
우두커니 그냥 있었다
이 촌구석에서
이 좋은 가을에
나는 정말 이렇게 살 사람이 아니라고
그렇게 여러번 일러줬는데도
나무들은 물 버리느라 바쁘고
동네 개들도 본 체 만 체다
지들이 잘났으면 얼마나 잘났는데
나도 더는 상대하고 싶지 않아
소주 같은 햇빛을 사발때기로 마시며
코스모스 길을 어슬렁거린다



*시집, 뿔을 적시며, 창비
 







어린 가을 - 이상국



옹기 장수가 왔다
어느날 서리처럼 왔다
지게눈을 한껏 높이고
하늘에 닿을 듯 자배기며 동이를 지고 왔다
감나무 이파리가 상기 퍼런데 일찍도 왔다며
어머니가 날기 멍석을 치워주자
입동 전 첫물을 지고 가마를 떠났단다
산그늘 아래 우리집 누에방에 짐을 풀고
한 사날 바꿈이를 하고 나면
그는 또 바람처럼 떠날 것이다
옹기 장수가 왔다
양양의 가을도 잘했지만
아래 데도 시절이 좋았다며
머릿수건으로 탁탁 몸을 터는데
묵은 담배냄새가 났다
언젠가 이런 가을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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